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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stPart Jul 14. 2024

번역 업체들을 향한 소심한 푸념

쓴소리보다 무소식이 무섭다구요

별다른 대책도 이뤄 놓은 것도 없이 대뜸 번역가가 될 것을 선언한 후, 시작하는 프리랜서 번역가는 대체 어떻게 일을 구하는 건지 번역가 카페를 뒤지며 열심히 조사할 무렵. 샘플 테스트라는 개념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서류 심사를 통과한 번역가는 업체에게 일정 분량 테스트 과제를 전달 받고, 그 번역 샘플의 퀄리티가 업체 기준을 충족할 경우 일을 받을 수 있다는 거다.


처음 이 용어를 접했을 땐 뭐 이렇게 쌈빡한 방식이 다 있나 싶었다. 말주변, 향상심, 사회성, 아직 들어갈지도 알 수 없는 회사를 향한 애사심까지 증명할 것도 보여 줘야 할 것도 너무 많은 면접과는 달리, 번역가는 번역 실력 딱 하나만 테스트로 증명하면 끝이었던 거다. 대가리 꽃밭이었던 그때의 나는 벌써부터 내가 천직을 발견한 줄로만 알았다.(정확히 3개월 후 통장 잔고가 처참하게 박살 나 10만 원 밑을 찍게 될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하지만 테스트 합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걸, 테스트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합격한다고 매번 일이 들어오는 것도, 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고 꾸준히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거든.


이젠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는 한 업체는 자기들 인재 풀에 날 등록한 다음 필요할 때 연락 준다고 통보한 이후 아직도 연락이 없다. 해당 메일을 받은 날짜는 2022년 5월이다.


이것보다 더 어이없는 업체도 있었다. 테스트 합격하고 나서 하도 연락이 없길래 내 테스트를 담당한 PM님께 연락을 드려 봤더니 본인은 이제 퇴사를 하셨댄다. 거기 대표님은 내가 테스트 합격한 걸 전달받긴 했을까? 돌아가는 모양새를 봤을 땐 몰랐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였다. 나는 곧바로 PM님 연락처와 주고받은 메일을 모두 지웠다. 짜증 나잖아.


그런데 사실 이것보다 골치 아픈 케이스는 테스트 합격한 직후 1-2건 정도 일을 주다가 별안간 연락을 뚝 끊어 버리는 경우다. 딱히 긍정적인 피드백도, 컴플레인도 없이 결과물만 받고 돈만 제때 입금한 후 몇 달 내지는 1년 넘게 정말 아무런 기별이 없는 경우. 드디어 일이 좀 풀리나 싶어 기대에 부풀어 오르던 나이브한 초짜 프리랜서는 언젠간 또 연락해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고문에 그 기간 내내 애태울 수밖에 없다. 업체를 더 파야 하나 기다려야 하나 판단이 잘 서지 않기도 하고.


번역업체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거고,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업체마다 인재 풀이 있을 거고, 인재 풀 안에 있는 번역가들에겐 우선순위가 매겨져 있을 거고, 사정이 급해서 잠깐 써먹으려고 들여놓은 굴러들어온 돌한테 일을 꾸준히 맡기기는 부담되겠지. 어지간히 잘하는 게 아니고서야. 그렇다고 아예 '너한텐 앞으로 일 못 줘'라고 못 박기엔 여차할 때 보조배터리처 써먹을 번역가를 잃게 되는 셈이니 그것도 마음에 드는 선택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런 식으로 아무 연락이 없는 건 시간을 들여 자기네들 일을 처리해 준 번역가들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번역 회사 취업을 해 본 적이 없어 그들이 얼마나 바쁜지는 잘 모르지만, 결과물을 봤으면 당연히 내부에서 느낀 감상이 있을 텐데, 그걸 공유해 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싶은 거지. 적어도 전업 프리랜서 초기에는 쓴소리 듣는 것보다 무소식이 훨씬 무섭고 힘겨운데, 업체들이 이걸 조금만 알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거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검수해서 피드백 주는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치들도 다 바쁠 테니. 다만 그냥 별점이라도 매겨 달라 이거야. 메일 한 줄 써 주는 거 그거 시간 얼마나 걸린다고.


"별 5개 만점에 2개입니다. 죄송한데 님한테는 일 더 못 드려요."


"별 5개 만점에 3개입니다. 일을 더 드릴 순 있는데 대신 다른 번역가님들이 바쁘면요."


"별 5개 만점에 3.5개입니다. 일을 더 드리긴 할 텐데 더 잘하시는 분 찾으면 일이 그분께 갈 수도 있어요"


예시만큼 극단적으로 말하는 경우야 잘 없겠지만 연락이 없을 바에야 나한텐 이렇게라도 답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특히 번역가 지망생 1년 차 땐 참 많이 했다. 이래야 프리랜서들이 이력서를 더 돌리든 뭘 하든 미련 없이, 마음 편히 대책을 세울 거 아닌가. 안 그래도 계산이 안 서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한테 적어도 그들의 위치 정도는 알려 주고 더 쓸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말해 주는 게 예의 아니겠어요. 몇몇 에이스를 제외하고는 프리랜서 번역가들은 그저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한 게 현실이니 딱히 배려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어쨌든 같이 일하는 사이인 마당에 번역가 입장도 조금은 헤아려 주면 어떨까 하는 작은 투정을 부려 본다.


P.S.

그렇다고 너무 의욕만 앞서 전화로 피드백을 30분씩 주는 것도 그거 나름대로 피곤한 일이다. 심지어 영양가 있는 피드백도 아니고 본인이 들어 본 적 없는 표현이라는 이유로 '뇌피셜 아니냐'며 이리저리 딴지 걸면서 귀찮게 하면 번역가 쪽에서 먼저 연락을 끊어 버리기도 하니까 뭐든 적당히 해 주시길. 그런 경우가 진짜로 있냐고요? 나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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