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살던 빌라에는 아빠의 서재가 따로 있었다.
아주 어릴 적 기억이지만, 그 방은 서글하고 온유한 아빠의 모습과는 상반될 정도로 엄숙하고도 이지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나의 동화책 5권 정도를 포개야만 한 권이 나올 수 있을 정도의 두툼한 책들이 빽빽이 책장을 매우고 있었고, 알록달록한 장난감 하나 찾을 수 없는 근엄한 방이었다.
그때 당시 내 나이 5살, 어딜 가든 영역 표시를 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똥강아지 나이.
나는 기어코 어른의 향이 짙은 방 안을 뚫고 들어가 당당히 책장 위에 짱구 비디오 CD를 올려뒀다. 핑크색 내복을 입은 짱구 그림이 그려져 있는 그 CD를 말이다.
나는 짱구가 좋았다.
어른들 눈엔 아무 데서나 엉덩이 까고 다니는 철없는 어린이로 보일지 몰라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이들의 눈에 짱 구는 한결같이 쾌활한 아이였다.
그렇게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처럼 짱구 만화를 챙겨 보니 함께 성장한 기분도 들었다. 2D 죽마고우랄까.
하지만 아빠는 내가 말썽을 부릴 때마다 "허구한 날 짱구를 보니까~" 하며 운을 떼며 나무라셨고, 내가 짱구 편에 선다면 아빠는 더 노하실 게 뻔해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분하지만.
중학생 때도 하교만 하면 곧장 방에 들어가 컴퓨터로 짱구를 틀어놓았다.
그때는 인터넷 방송에서 생방송으로 만화를 틀어줬 는데, 하루 종일 틀어주니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넋 놓고 만화를 시청했고, 이것은 곧 아빠의 화를 부르는 시초가 되었다.
하필이면 성적표가 나온 날일게 뭐람. 아빠의 체벌 방식은 늘 그랬듯 매우 단호하고도 냉철했다.
성적표를 확인하시고 방에 들어오시더니 긴 말 할 것도 없이 컴퓨터 모가지를 떼가셨다. 눈 뜨고 허파를 뜯긴 기분이었다. 분명 계속 주시하고 계셨던 거겠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이는 척하며, 커다란 모니터를 들고 어디로 가시는지 문틈 사이를 곁눈질로 응시했다. 베란다로 가시는군. 나는 속으로 조소했다.
다음 날 집에 돌아오니 오빠가 먼저 하교한 상태.
방에 조용히 들어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오빠의 존재는 아빠의 CCTV와도 같았다.
무모하게 베란다에서 내 몸통만 한 모니터를 들고 오다간 오빠는 전화기를 들 게 뻔했다. 나는 이성과 사고를 가진 동물이 아닌가. 이럴 때일수록 현명하 게 나와야 한다.
곧장 주방으로 갔다. 양은 냄비에 물을 받아 얌전히 라면을 끓였다. 그리고 한 손엔 냄비 한 손엔 김치를 들고 오빠 방 문을 두들겼다.
"알지?" 나는 이 두 글자조차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눈빛으로 말했을 뿐.
컴퓨터를 하고 있던 오빠는 양손 가득한 모습을 보 고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묵언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협상체결!
기쁜 마음에 콧노래를 부르며 베란다 화분 뒤에 가려진 모니터를 낑낑거리며 들어 올렸다.
평소에 우둔한 머리가 이번엔 꽤 쓸모 있었다. 그렇게 아빠가 오시기 전까지 정열적으로 만화를 시청했다.
그리고 아빠가 퇴근하시기 전 미리 원래 자리에 모니터를 갖다 놓고선 시무룩한 가면을 쓰고 집에 오신 아빠를 맞이했다. 오빠는 생각보다 꽤 의리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돼서도 이것저것 오빠에게 뇌물을 쥐어주며, 짱구와의 관계를 돈독히 이어갔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엔 짱구와의 우정은 예전 같지 않았다.
짱구는 TV 속 그 자리에 변함없이 존재하지만, 나는 매 순간들의 변화들을 온몸으로 받는 인간이기에.
TV를 틀다 우연히 짱구가 나오면 알 수 없는 감정들에 휩싸였다.
반가움 보단 그리움이었다. 짱구에겐 나의 어린 시절들이 묻어있다.
티 없이 맑고 심플한 그림체의 짱구 모습엔 나의 유년시절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그리운 건 캐릭터도 에피소드도 아니다. 돌아가지 못하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짱구는 지금도 이름 모를 어린이들의 친구일 것이다. 내게도 그랬던 것처럼.
그 시절에 두고 온 나의 동심과 어린 영혼의 형상은 어쩌면 짱구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