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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어느 봄날(A Spring Day in Mid)

by 정성균


저녁 식탁에 마주 앉은 우리는 별다른 말없이 식사를 마쳤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고, 집안은 두 사람만의 정적에 잠겨 있었다. 창밖으로는 어스름이 내려앉고, 멀리 아파트 단지 불빛들이 하나둘 보석처럼 켜지기 시작했다. 즐겨듣는 유튜브에서는 첼로의 낮은 선율이 흐르고, 부엌에서는 설거지를 하는 아내의 익숙한 손놀림과 그릇 부딪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봄밤의 공기는 낮의 소란과 햇살의 열기를 가라앉힌 채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게 또 한 계절을 지나 맞이한 일요일 봄날은, 고요하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젊은 날의 봄이 선명한 원색의 감정이었다면, 지금의 봄은 복잡하게 겹쳐진 색의 층위처럼, 은은하고 깊은 색조로 마음을 물들인다.


아침의 작은 의식


햇살은 알람보다 먼저 나를 깨웠고, 새들의 지저귐이 유난히 청량하게 들렸다. 커튼을 젖히자 조팝나무 꽃이 이슬을 머금은 채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고, 묵직한 머그잔을 손에 감싸며 거실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감정이 쉽게 휘둘리진 않았다.


정치, 경제, 사회의 소식들을 보며 ‘그저 그런 일이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과, 이미 휩쓸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이는 달관일까, 무기력일까. 어쩌면 그 중간 어딘가쯤일 것이다.


봄날의 산책


아내와 함께 집 근처 오래된 공원을 찾았다. 공원에는 봄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잔디밭의 연인들, 어린아이와 부모, 반려견과 산책하는 이들, 지팡이를 짚은 노인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문득, 세대의 한가운데 서 있음을 느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우리도 저들처럼 유모차를 끌고 벚꽃 아래서 사진을 찍곤 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훌쩍 자라 각자의 삶을 살고, 그 빈자리를 조용히 마주하며 살아가는 시간. 벚꽃은 이미 절정을 지나 꽃비를 흩날리고 있었다. 찰나의 화려함은 아름답지만, 소멸을 동반하는 그 모습은 더욱 깊은 여운을 남긴다.


새싹과 시작


땅에 떨어진 꽃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작은 새싹을 아내가 찍고 있었다.

“이것 봐요. 다 지는 것 같아도 또 이렇게 새로 시작하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은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며 우리에게 삶의 본질을 일깨운다. 빈 둥지의 허전함 속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가꾸고 있었다. 부부만의 조용한 연대 속에서,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배워가는 중이다.


햇살 아래의 벤치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따뜻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잠시 쉬었다. 아내는 방금 찍은 사진을 넘기며 미소 짓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설렘과 열정의 사랑은 희미해졌을지 모르나, 이제는 깊은 신뢰와 편안한 동행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여보, 우리도 한때는 참 화려했지? 당신 나 좋다고 그렇게 쫓아다녔잖아.”

아내의 농담에 웃음이 났다.

“지금은 저 벚꽃나무 밑동처럼 든든하잖아. 세월의 멋이지.”


희끗해진 머리카락과 주름진 눈가 속에서, 함께 견뎌온 시간의 깊이를 발견한다.


텃밭에서 배우는 마음


오후에는 베란다의 작은 텃밭을 정리했다. 겨울을 견딘 방울토마토가 다시 파릇한 새순을 올리고 있었다. 흙을 만지고 잡초를 뽑으며 문득, 내 마음의 밭을 떠올렸다.


돌보지 못한 사이 자라난 걱정과 집착, 오래된 후회와 원망. 그것들이 혹시 지금의 나를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


텃밭을 가꾸듯 마음도 돌아보고 정리해야겠다. 봄이 주는 새 출발의 기운을 마음속에도 심고 싶다.


저녁의 정적과 따스함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쪼그려 앉아 있다 보니 허리도, 무릎도 시큰거렸다. 당연했던 체력과 건강이 더는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저녁엔 아내와 함께 조용히 저녁을 준비했다. 마늘을 다지고 양파 껍질을 벗기며 주방 창밖을 보니 붉은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오늘 하루의 평범한 순간들 속에서 잔잔한 행복과 성찰을 느꼈다. 이것이 중년의 일상을 지탱하는 진짜 힘이 아닐까.


하루의 끝에서


설거지를 마친 뒤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의 기억이 느린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조팝나무, 벚꽃 잎, 텃밭의 새순, 아내의 눈웃음, 저녁 식탁의 따스함.


그리고 문득 떠오른 어머니와의 통화. 고향집 마당의 목련이 탐스럽게 피었다고 하셨다. 당신도 한때는 꽃 같던 청춘을 살았을 것이다. 이제는 홀로 봄을 맞이하는 어머니.


조만간 시간을 내어 고향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와 함께 목련 아래에서 봄을 나누고 싶다.


봄밤의 끝자락에서


몇 시간 후면 자정이 되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될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은 때로는 지겹지만, 오늘의 따스한 기억들이 다가올 날들의 작은 등불이 될 것이다.


중년의 봄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수많은 계절을 지나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와 감사, 뿌리 내린 삶의 강인함이 담겨 있다.


창문을 열자 서늘한 밤공기가 밀려든다. 사이렌 소리 하나 지나가고, 다시 고요가 찾아온다. 오늘 하루를 마음에 새기며, 나는 평온히 눈을 감는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묵묵히 살아갈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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