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창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가 안겨왔다. 햇살은 조용히 방 안으로 스며들고, 땅 위에는 연둣빛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오랜 친구가 인사하듯, 봄이 조용히 찾아온 것이었다. 차가운 계절을 지나며 얼어붙은 마음 한켠에도 슬며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분이었다. 계절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마음이 머무는 결을 따라 스며들며, 조용히 삶의 감각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을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하루를 봄날처럼 살아보라고. 그 말에는 맑은 날씨를 즐기자는 뜻보다, 계절이 오기 전 먼저 깨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마주하라는 깊은 권유가 담겨있다. 바람결에 실린 꽃향기, 오후의 나른한 햇살, 따뜻한 찻잔을 손에 쥐고 멍하니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들. 모두가 어떤 감정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감정은, 아주 작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사람을 바꾼다.
나는 생각했다. 봄은 정말로 특별한 계절일까? 아니면 우리가 특별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꽃이 피고, 새싹이 돋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달라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다.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봄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겨울 내내 움츠렸던 몸을 펴고 슬며시 문을 열어 밖으로 나서면, 계절은 어느새 완전히 얼굴을 바꾸고 있다. 거리에는 분홍빛 벚꽃이 가득하고, 길모퉁이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 있다. 누군가는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다. 이 모든 풍경이 어쩐지 따뜻하고 느긋하게 느껴지는 건, 봄은 어느 순간부터 계절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한 사람의 태도로 느껴졌다. 피어날 것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 그 조용한 확신이 풍경보다 먼저 찾아왔다
봄을 맞이하는 일은, 어쩌면 내 안의 정원을 다시 가꾸는 일이다. 감정의 잡초를 뽑고, 관계의 밭을 갈고, 새로운 일상을 심는 시간. 그것은 단지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꽃이 피기까지의 기다림과 노력, 그리고 작은 손길을 포함한 전체의 과정이다. 그래서 봄은 그저 ‘좋은 계절’이 아니다. 봄은 나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너의 마음을 얼마나 돌보고 있니?”
이 계절에 누군가는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랜 이별을 겪는다.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사람도 있다. 삶은 각자의 방식으로 봄을 맞이하고,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생겨난다. 어떤 이는 벚꽃 아래에서 웃고, 또 어떤 이는 그 벚꽃을 보며 지난날의 누군가를 떠올린다. 기억이란 것은 그렇게 계절과 맞물려 돌아온다.
봄이 오면, 우리는 타인과의 거리도 조금 더 가깝게 느낀다. 겨울에는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따뜻한 바람과 함께 살짝 열린다. 이웃과의 인사에 부드러운 미소가 담기고, 가벼운 대화가 뜻밖의 공감으로 이어진다. 사람은 본래 다정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다정함이 피어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카페 한켠에서 마주친 노부부의 손끝에, 오래된 다정함이 앉아 있었다. 말없이 나누는 눈빛, 작고 천천한 대화, 그리고 함께 바라보는 창밖의 봄. 그 장면이 왠지 모르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오래된 사랑은 소리 없이 피는 들꽃 같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마음 깊은 곳을 조용히 감싸주는 향이 있었다.
이런 따뜻한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봄날처럼 살아간다는 건,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만드는 대단한 일이 아니고, 작고 사소한 순간에 머무는 마음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출근길에 마주친 이름 모를 꽃을 보고 발걸음을 잠시 멈추는 일. 붉게 물든 노을을 보며 마음이 찡해지는 순간. 그런 감정들이 쌓여, 결국 우리의 하루가 봄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삶이 그리 유쾌하지 않을 때도 있다. 계절은 변하지만, 현실은 그대로인 날도 있다. 그런 날에도 봄의 조각들은 우리 곁에 머무른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한마디, 길가에 핀 꽃 한 송이, 따뜻한 차 한 잔. 봄은 그렇게 작고 조용한 방식으로 마음속에 들어온다.
삶이라는 건, 결국 누군가와 함께 만드는 계절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피어날 수 없는 따뜻함, 오롯이 나눔으로만 완성되는 봄날의 의미. 우리가 그 봄날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진다.
봄은 동시에, 용서의 계절이기도 하다. 지난 계절의 실수나 후회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시간. 누군가에게 다 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지금이 그 말을 꺼낼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계절은 늘 두 번 오지 않지만, 마음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어느 날 산책길에서 오래전 친구를 우연히 마주쳤다. 어색한 미소와 함께 주고받은 안부 인사. 그 몇 마디에 담긴 시간은 생각보다 깊고 따뜻했다. 그렇게 인연은 느닷없이 다시 찾아오기도 하고, 이미 지나간 줄 알았던 장면이 새로운 감정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봄은 그 모든 가능성을 품은 계절이다. 기다림, 재회, 시작, 이해, 회복…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이 교차하는 시간. 그래서일까, 봄이 오면 사람들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작은 울림을 느낀다. 그것이 그리움이든, 기대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 울림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유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봄날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당신의 마음에도 햇살 한 줄기쯤은 머물고 있는가? 그 봄날의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이 지나간 뒤에도, 봄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오늘을 잘 살아낼 이유가 충분하다.
그러니 오늘, 봄날의 속도로, 당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가기를. 잠시 멈추더라도 괜찮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지금 여기 머무르기를. 그리고 언젠가, 당신의 봄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시작이 되기를.
부디 당신의 하루가 햇살로 가득하고, 마음 한편에서 들꽃처럼 조용히 피어나는 기쁨이 함께하길 바란다. 봄날은 그렇게, 당신 안에 머무는 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