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오래 남는 사람

by 정성균

자기소개를 부탁받을 때마다, 텅 빈 백지 앞에 선 기분이었다.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버리고, 겨우 이름 석 자를 꺼내는 순간조차 어색함이 감돌았다. 나를 설명하려 애쓰면 쓸데없는 말들만 맴돌았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곱씹을수록 생각은 복잡한 미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럴 때면 늘 숨 막히는 답답함에 갇히곤 했다.


어느 날, 문득 멈춰 서서 지금껏 내가 무심히 흘려보낸 나의 조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타인이 나를 떠올릴 때, 가장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딱딱한 이력서보다 앞서 시선이 머무는 건, 어쩌면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 프로필의 한 줄일지도 몰랐다. 몇 장의 흐릿한 사진, 짧지만 함축적인 소개 문장, 그리고 글 속에 배어나는 고유한 어투. 그 안에서 이미 조용히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애써 무언가를 꾸미려 하지 않아도,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고유한 인상이 남는 법이다. 조용히 써 내려간 서툰 글 한 편,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은 자연스러운 사진 한 장. 그 소소한 흔적들 속에도 그 사람만의 분위기는 스며들기 마련이다. 결국, 무늬라는 건 거창한 포장이 아니라, 한 사람이 남긴 삶의 자취와 같은 것이리라. 굳이 정리하려 들지 않아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어떤 잔상, 애써 감추려 해도 은은하게 드러나는 고유한 감각 같은 것 말이다.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쓰고 싶은 이야기들을 엉성하게 적어 내려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문장을 엮고, 때로는 엉뚱한 곳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심코 지나친 댓글 하나가 가슴에 깊이 박혔다. “당신 글은 조용한데 오래 남네요.” 그 평범한 문장을 곱씹는 순간, 머릿속에 희미한 전구가 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이것이 바로 나였구나. 굳이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아도 잔잔하게 스며드는 나만의 기류. 그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흐름 같은 것.


그때부터 고유한 색깔을 찾아 조율하는 섬세한 과정이 시작되었다.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내 감정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을지, 문장의 호흡은 어떻게 가져가야 독자에게 편안하게 다가갈지. 어떤 흐름이 나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무엇을 덜어내야 비로소 나만의 결이 선명하게 드러날지 고민했다. 그것은 화려하게 덧칠하는 더하기의 작업이 아니라,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조심스럽게 걷어내는 빼기의 과정이었다.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을 리듬감 있게 배치하고, 때로는 쉼표 하나의 미묘한 떨림으로 문장의 흐름을 바꾸면서, 의미가 깊이 고이는 지점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다듬어진 문장 하나하나가, 결국 나라는 이미지를 섬세하게 비춰주는 필터이자 은은한 조명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늬라는 것은 결코 거창하거나 화려한 포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값비싼 옷을 걸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어떤 질감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머무는가 하는 섬세한 방식이었다. 단어의 미묘한 결, 이미지를 향하는 방향, 무심코 드러나는 말투의 습관까지. 이 모든 작은 요소들이 조용한 설득력을 지니고, 결국 그 사람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무늬는 곧 그 사람의 존재 방식 자체이며, 자신을 설명하는 능숙한 기술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만이 섬세하게 배치할 수 있는 일종의 예술과 같은 것이었다.


어떤 주제에 마음이 끌리고, 무엇에 오랫동안 시선이 머무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어떤 태도에서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이 은은하게 스며져 나오는지. 굳이 목소리를 높여 강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어떤 분위기가 분명히 존재했다. 무심한 듯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에도,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해 낸다. 그것은 단순히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스타일이자, 섬세한 감각이었다. 나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어떤 면모를, 타인이 먼저 알아채는 바로 그 순간부터, 어쩌면 무늬 만들기는 이미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여전히, 내 이름 앞에 어떤 단어를 붙여야 할지 망설여진다. ‘작가’, ‘기록자’, ‘사유하는 사람’… 어떤 단어 하나만으로는 온전한 나를 담아낼 수 없다는 답답함에 자주 휩싸인다. 그래서 끊임없이 글을 고치고, 어색한 문장을 다듬어본다. 그것은 단순히 이름을 예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는 나의 존재감을 섬세하게 조율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어쩌면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심스럽게 설정하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나를 무늬 화한다는 것은, 화려한 옷으로 겉모습을 치장하는 요란한 행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고유한 색깔을 발견하고, 그 색을 중심으로 매일의 소소한 선택들을 신중하게 쌓아나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과정에 더 가까웠다. 무늬란 결국, 수많은 작은 선택들의 신중한 누적이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나만의 리듬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독특한 필터와 같은 것이리라. 진심을 담아 정성껏 쌓아 올린 언어들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또렷한 하나의 인상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새겨질 것이다.


누군가에게 억지로 잘 보이기 위해 꾸며낸 말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을 가장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언어.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하나의 또렷한 기억이 되고, 잊히지 않는 인상이 된다. 결은 마치 희미한 발자국과 같다. 매일 무심코 남기는 작은 말 한마디와 스쳐 지나가는 짧은 장면들, 그 소소한 흐름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사람의 고유한 이미지로 서서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굳이 단단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억지로 선명해지려 발버둥 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고 조용히 흘러가는 지속적인 흐름 그 자체이다. 그 흐름 속에서 오늘도 자신을 조금씩 정리하고, 다듬어 나간다. 매일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의 루틴,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 그리고 내 안의 혼란스러운 언어들을 차분히 정리하고 다듬는 연습. 이 모든 평범한 행위들이 결국 나라는 결을 흉내 낼 수 없게 구성하는 소중한 조각들이다.


새로운 아침이 밝아온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창문을 활짝 열자, 새벽의 차가운 바람이 조용히 말을 건넨다. 천천히 커피를 내리며 조용한 하루를 차분히 준비한다. 오늘 하루는 또 어떤 낯선 풍경과 예상치 못한 감정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문득 그런 설렘과 불안함이 뒤섞인 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이렇듯 사소한 아침의 시작이, 결국 그날 하루 전체의 분위기를 은은하게 물들이고, 그 하루하루들이 쌓여 결국 나라는 사람을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이다.


낯선 표지의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펼쳐 든다. 익숙한 디자인도 아니고,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저자의 이름이 어색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묘한 이끌림에 서서히 책 속의 이야기 속으로 깊숙이 빠져든다. 현란하고 자극적인 표현 대신, 느릿하고 차분한 설명들이 오히려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돈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문득 생각이 멈추고, 어떤 문장에서는 가슴 한쪽이 간질거리는 낯선 감각에 휩싸인다. 마치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미지의 길을 조심스럽게 탐험하는 기분. 때로는, 이렇듯 예상치 못한 낯섦이 익숙했던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배움이란, 머릿속에 딱딱한 지식을 억지로 쌓는 행위가 아니라, 내 안의 섬세한 언어들이 조용히 자라나는 신비로운 과정과 더 닮아있다. 무심코 던져진 문장 하나가 오랫동안 잠자던 생각을 조심스럽게 건드리고, 짧고 평범한 단어 하나가 예상치 못한 깊은 인상으로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맴돈다. 익숙한 틀에서 살짝 벗어난 낯선 표현들이, 오히려 나를 새로운 시각으로 되돌아보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다. 낯선 지식을 그저 습득하는 것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낯선 시선을 갖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배움의 본질이 아닐까. 배움은 결국 더 정확하고 다채로운 언어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도와준다. 언어의 선택지를 넓혀주고, 그 무수한 선택지들이 쌓일수록, 한 사람의 결은 더욱 촘촘하고 유일하게 다듬어진다.


어스름한 저녁이 찾아오면 습관처럼 조용한 책상 앞에 앉는다. 억지로 무엇을 써야겠다고 애써 정하지 않는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잔잔한 음악에 기대어, 천천히 손에 익숙한 펜을 든다. 오늘 하루 동안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장면들 중, 마음 한구석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단 하나의 순간을 조심스럽게 떠올려본다. 무심하게 주고받았던 짧은 대화 한마디,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던 낯선 풍경, 문득 찾아왔던 짧고 깊은 고요의 순간. 그 소소한 조각들 속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어떤 목소리가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어떤 날은 그 목소리가 흐릿하고, 또 어떤 날은 놀랍도록 또렷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선명함의 정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바로 이 자리에, 시간을 붙잡고 앉아 있다는 사실. 그것이 전부이자, 시작이다.


애써 완벽한 글을 완성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매일 같은 시간, 익숙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자신과 마주하는 그 소중한 시간 그 자체이다. 매일 반복되는 이 유일한 행위는,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한 사람을 은은하게 설명해 주는 하나의 익숙한 풍경처럼 자리 잡을 것이다.


이렇게 하루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자신을 정리하다 보면,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 안의 고유한 무늬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아주 조금 더 나다운 느낌. 그 소소하면서도 특별한 변화들이 하나뿐인 방식으로 쌓여간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굳이 요란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타인에게 은은하게 전달되는 나만의 독특한 결이 조용히 완성되어 있다는 것을.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가만히 느껴지는 그 감각. 그것이 바로 천천히 쌓아온 언어의 고유한 힘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그 분위기. 그것은 요란한 외침이 아니라, 나만의 하루하루의 반복 속에서 천천히 자라나는 고유한 이미지와 더 닮아있다. 그리고 오늘도, 어제와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자신을 다시 시작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말없이 가르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