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편 - 침묵이 쌓이면 벽이 된다
처음엔 괜찮다고 생각했다. 말없이 보내는 시간이 오히려 더 따뜻하게 느껴졌고,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도 일종의 배려라고 여겼다. 바쁜 하루 속에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 그 고요함이 어쩌면 더 단단한 신뢰를 쌓아주는 거라고 믿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침묵이 오래되면, 마음도 어느새 멀어지기 시작한다. 눈을 마주치고도 피하게 되고, 말을 꺼내야 할 순간에 망설이게 된다. 오늘이 아니라도, 내일 말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넘긴 하루가 몇 번이고 반복되면, 어느새 말이라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간단한 인사 한마디조차 꺼내기 어려워진다.
사실 침묵의 시작은 다정한 마음이었다. 지친 하루를 보내는 그에게 굳이 말을 보태고 싶지 않았다. 어떤 날은 괜한 말 한마디가 공기를 흐트러뜨릴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말이라는 건 그렇게 아끼다 보면, 어느새 말 자체가 사라진다.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스스로도 모르게 굳어가고, 감정은 마음속에서 뒤엉킨다.
그렇게 생긴 오해는 작지만 깊게 자리 잡는다. 말하지 않았기에 더 크게 부풀고, 설명되지 않았기에 더 오랫동안 머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조용히 벽이 쌓인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더 무서운 벽이다. 다툰 적도 없고, 큰 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건너는 길이 보이지 않게 된다.
예전에는 사소한 것에도 웃었다. 퇴근 후 마주 앉아 나누던 이야기, 설거지를 하며 흘러나오던 음악에 맞춰 흥얼대던 노래,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던 순간. 그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말을 꺼내기 전에 머릿속으로 문장을 고르고, 표정을 가늠하고, 반응을 예상하게 된다. 그 과정이 버겁고, 결국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어쩌면 그 사람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말을 하려다 그만둔 순간, 눈을 맞추려다 피했던 기억. 마음속에만 고여 있는 말들이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은 계속된다. 왜냐하면, 다시 말을 시작할 수 있다는 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침묵이 편안함이 아닌 거리로 바뀌는 순간, 마음의 온도는 조용히 식어간다.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어도, 마음은 각자의 방향을 향한다. 부엌에서 물이 끓고, 방 안에선 노트북 자판 소리가 울리지만, 그 소리들 사이엔 공백이 있다. 서로를 의식하지만, 굳이 말을 걸지 않는다. 눈빛이 스치지만, 어느 누구도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 그 침묵은 피곤함과 무심함, 익숙함과 망설임이 뒤섞여 만들어진 복합적인 공기다.
언젠가부터 같은 소파에 앉아 서로 다른 화면을 바라보는 일이 익숙해졌다.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도 각자의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같은 창밖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마음의 결은 점점 달라지고, 말하지 않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감정의 간극은 더 또렷해진다.
가끔은 조용한 밤이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별일 없던 하루의 끝에 괜히 마음이 무겁고, 뭔가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럴 때면, “오늘 어땠어?”라고 물어보고 싶지만, 그 한마디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 혹시라도 짧은 대답만 돌아오면 어쩌나, 그런 사소한 불안이 말을 멈추게 만든다.
사람 사이의 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은 그것을 가장 먼저 감지한다. 같은 방에 있어도 서로의 온도가 다르면, 그 조용한 간격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틈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깊어진다.
그날 밤, 무심코 고개를 들어 바라본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함께 있는 시간이 분명 있었는데, 어째서 마음은 다른 곳에 머물러 있는 걸까. 나만 이 자리에 멈춰 있는 건 아닌지, 서로의 감정을 지나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관계를 되돌리기 위한 거창한 노력이 필요한 건 아니다. 때로는 아주 작고 사소한 한마디, “요즘 어떤 생각해?”라는 질문 하나면 충분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 말 안에 진심이 담겨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벽에 작은 금이 생길 수 있다. 말은 때때로 어색하고 부족하지만, 침묵보다 훨씬 따뜻한 것이다.
오늘도 말없이 지나가려던 하루였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기 전에 작은 인사를 건네보기로 했다. “괜찮아?”
그 말이 조용히 쌓인 벽에 균열이 되기를.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가까운 마음으로 마주하길 바라며. 그리고 그 마음이 다시 서로를 향해 열릴 수 있기를.
《마음의 거리》, 다음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