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거리》

22편 - 고요한 말이 건네는 위로

by 정성균


"수고했어." 이 짧은 세 글자가 지닌 힘을 아는가? 때로는 이 한마디가 얼어붙은 마음을 조용히 녹여놓곤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 그 말 한 줄에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형식적인 위로나 계획된 조언보다, 진심이 묻어나는 짧은 말 한마디를 더 깊이 갈망하는 순간이 많다. 언어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사람의 마음이 머문 자취와 관계의 숨결이 조용히 스며 있다. 그것은 마음의 숲을 일구는 씨앗이기도 하고, 때로는 오해를 부르는 독초가 되기도 하며, 진심을 담아 나르는 배이자 동시에 상처를 머금은 안개가 되기도 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진심을 언어 속에 가두어두고만 있었을까.


우리는 "잘하고 있어", "괜찮아", "네가 있어서 고마워" 같은 따뜻한 말을 생각보다 자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쉬운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왜 이리도 어려울까. 특히 가까운 이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당연히 느끼고 있겠지’ 하는 생각에 표현을 미루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관계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가장 소중하기에 조심스러워야 하지만, 그 소중함을 핑계 삼아 언어의 직접적인 확인을 소홀히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은 확인되지 않으면 흔들리게 마련이다. 오래 함께하고, 서로를 잘 안다고 믿을수록 오히려 표현은 흐려지고, 감정은 점차 투명해진다. 결국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는 디지털 시대의 '좋아요'와 댓글이 결코 채울 수 없는 고요한 거리감을 남긴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어서 전혀 몰랐어’라는 오해가 자라나고, 관계에는 금이 간다.


따뜻한 말은 상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가장 간결하면서도 깊은 방식이다. 무게를 앞세운 위로보다, 가볍지만 진심인 말 한 줄이 더 큰 힘이 된다. 언어는 감정을 싣고 가는 작은 배와 같다. 말의 온도에 따라 마음은 기꺼이 정박하거나, 소리 없이 멀어진다. 나는 내 마음을 실은 그 배가 늘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기를 바란다. 말은 뜻을 전하는 언어이면서도, 때로는 마음의 온도를 나누는 조용한 다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말을 기능으로만 여기지만, 실상 언어는 살아 있는 생명처럼 다가온다. 어떤 말은 희망의 씨앗이 되어 자라나고, 어떤 말은 관계를 풍요롭게 가꾸는 거름이 된다. 반대로 무심코 내뱉은 말은 깊은 생채기를 남기기도 하며, 차가운 침묵은 벽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말버릇은 관계의 모양을 바꾸고, 결국 우리 삶의 온도를 결정짓는다.


나 또한 그런 순간을 기억한다. 고된 하루를 마친 어느 저녁, 지친 몸으로 사무실을 나서던 순간 "오늘도 고생 많았어"라는 짧은 인사를 들었다. 그 말이 마치 따뜻한 담요처럼 온몸을 감쌌다. 당장의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마음만큼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 한마디 덕분에 충분히 괜찮아질 수 있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그 말은 메마른 내 마음에 깊이 스며들었다. 말은 단순한 음파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존재를 인지하고, 고통을 이해하며, 감정을 함께 짊어지는 섬세한 행위다. 우리는 그런 말을 통해 서로에게 다가가고, 외로움 속에 버티던 존재들이 비로소 ‘우리’로 엮이게 된다.


말은 때를 타고 흐른다. 너무 빠르면 준비되지 않은 마음을 덜컥 다치게 하고, 너무 늦으면 진심이 닿기도 전에 희미해진다. 언어는 감정의 전달임과 동시에 기다림의 기술이다. 상대의 마음이 열릴 타이밍을 헤아리고, 그 여백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섬세한 배려일 것이다. 말은 ‘무엇을’보다 ‘언제, 어떻게’ 전해 졌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울림을 남긴다.


진심이 담겼다고 해서 모든 말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은 아직 그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말이 닿기 어려운 거리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침묵이 더 따뜻한 배려가 된다. 관계는 말의 양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말의 결을 읽고, 속도를 맞추며,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감각에서 더욱 깊어진다. 언어는 때를 아는 이에게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말조차 어려운 순간도 있다. 침묵이 무관심이 아닌 존중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을 때가 있다. 말없이 곁에 있다는 건, 상대방의 시간을 기다려준다는 의미일 수 있다.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을 알아채고,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곁을 지키는 일. 그것이야말로 어떤 위로보다도 더 따뜻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한다. 무엇을 해줘야 할지,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를 생각하며 애쓰다가 마음을 오히려 다치게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마음이 힘든 날에는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위로가 되는 순간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배우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한 그 공간.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다정함이 아닐까. 그 안에서 마음은 서서히 회복된다.


때로는 어떤 감정은 말로 꺼내려할수록 더 깊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누군가의 다정한 말보다, 조용한 숨소리 하나가 더 큰 위로가 된다. 함께 침묵할 수 있는 사람, 말없이 머물러도 어색하지 않은 존재. 그런 이는 흔치 않지만, 한 번 마음에 자리하면 오래 함께한다. 나는 말없이 곁에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던 누군가를 기억한다. 침묵은 마음의 고요한 호수, 그 안에 비로소 진실이 비친다.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침묵은 때때로 부재로 오해받지만, 진정한 침묵은 충만한 존재의 표현이다. 그것은 깊은 이해와 존중, 그리고 기다림의 마음이 담긴 언어 없는 언어다.


누구에게나 그런 존재가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굳이 위로하지 않아도, 곁에 있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사람. 어떤 날은 조용히 옆에 앉아 시간을 함께 건너주는 그 존재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한다. 카페 창가에서 차를 마시며, 빗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 없이 머무는 그 고요한 시간. 그런 장면은 별다른 일이 없었어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 그 들으면서도 의미를 깊이 되새기진 않는다. 무언가를 해주지 않아도, 말을 해주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 그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숨이 트이는 관계. 말이 필요 없는 그 침묵 속에서, 사람은 오히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를 얻는다. 그것은 언어가 모든 기능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시작되는, 가장 근원적이고 오래 남는 위로일지도 모른다.


조용한 다정함은 가장 깊게 마음에 새겨진다. 그것은 말이 아닌 시선과 몸짓, 공간을 가득 채운 감정으로 전해진다. 굳이 끌어내지 않아도,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존재. 나는 요즘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도, 그 자리에 있어줄 수는 있으니까. 말보다 존재가 더 큰 힘이 되는 순간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더 자주 표현하려 한다. 느껴지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고마운 감정은 바로 전하며, 사소하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 한다. 따뜻한 말은 건네는 이와 받는 이 모두에게 온기를 준다. 이제는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말 한마디로 누군가의 마음을 지지할 수 있는 사람. 그 작은 실천이 결국엔 서로의 삶을 단단히 지탱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수고했어", "힘들었겠다", "오늘 잘 견뎌줘서 고마워." 이 짧은 문장들이 누군가의 하루를 버텨내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말은 사라져도, 그 말이 남긴 감정은 오래도록 남는다. 마음을 지지한 언어는 기억 속에 빛처럼 머문다. 그것은 삶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작은 등대와 같다. 언어는 단순한 전달을 넘어서, 서로의 영혼을 잇는 다리다. 우리는 이 다리를 통해 고통을 나누고, 기쁨을 배로 만들며, 외로움을 덜어낸다.


오늘 누군가의 어깨가 유독 무거워 보인다면, 그 인사를 건네본다.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나 진심이 느껴지도록. 때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날, 그 한마디가 가장 큰 위로가 된다. 표현은 짧아도, 그 안의 마음은 깊다. 매일 나누는 이 짧은 문장들이 서로의 하루를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오늘도 조용히 건넨다. "수고했어." 그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나는 너를 알고 있어', '너의 하루를 이해해',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는 말 없는 응원의 메시지다.


우리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그런 고요한 시간 속에서 조금씩 배운다. 마음이 힘든 날,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 따뜻한 진실을 오늘도 가만히 되새겨본다. 언젠가 사라질 말일지라도, 마음에 남은 온기는 오래 기억된다. 당신이 건넨 그 한마디도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빛이 되어줄 수 있다. 이 모든 말 없는 소통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진짜 언어와 진짜 존재의 힘을 갈망하고 있다. 당신은 오늘, 누군가의 등대가 되어줄 준비가 되었는가? 우리가 나눈 그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 빛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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