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편 - 좋았던 사람, 지웠던 사람, 남은 사람
기억은 참 묘한 존재다. 때로는 우리를 착각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고 믿을 즈음,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불쑥 나타나니 말이다. 그리움이 꼭 특별했던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아주 애틋해서가 아니라, 그저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감정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틀고 남아 있었기 때문일 때도 많았지.
좋았던 사람, 잊히지 않는 온기
누구에게나 좋았던 사람이 있을 거다. 떠올리면 낡은 페이지에 밴 잉크 냄새처럼, 잊힌 줄 알았던 말들이 다시 피어오르는 이름,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먼저 알아봐 주던 눈빛, 바쁘다는 말보다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을 더 자주 내보였던 그런 이 말이다. 그 사람은 언제나 먼저 웃어주었고, 내가 울음을 참지 못할 때는 옆에서 조용히 손을 잡아주곤 했다. 말없이 건네던 그 따뜻한 배려가 아직도 가슴 어딘가에 온기로 남아있다. 나는 왜 그 온기를 이토록 오래 기억하고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나의 일부를 그가 조용히 껴안아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시절, 어느 겨울밤이 지금도 선명하다.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걷던 그 길. 입김이 허공에 하얗게 맺히고, 발밑의 눈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던 그 고요한 순간에, 나는 더없이 편안했던 걸 기억한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아도 고스란히 전달되던 감정, 그건 아마도 '믿음'이었을 거다. 시간이 흘러도 그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하지만 그 온도는 달라졌다. 뜨거움은 잦아들었고, 남은 건 서늘한 평온함이었다. 감정은 흘러도, 의미는 퇴적된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 겨울밤의 기억만큼은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따뜻하게 빛나고 있다. 그 시절의 그와 나눈 기억은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문득 떠오르는, 잊히지 않는 정서로 남아 있다. 아마 그때의 내가 어떤 모습이었든, 온전히 나 자신일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꽤나 불안정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어깨가 축 처져 있었지. 그날 그가 건넨 말은 마음 깊숙한 곳에 남아 있던 감정의 결을 천천히 풀어주는 듯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주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어떤 날은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통화 속에서, 그는 내 고민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듣고 함께 아파해 주었다.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그저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큰 위안을 얻었다. 그는 내가 힘들 때마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내 곁에 있어 주었고,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항상 존중해 주었다. 그런 배려와 지지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시절의 기억은 마음 한편에 고이 접힌 채, 기쁨과 아릿함이 겹쳐진 채로 남아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지침서와도 같았지. 그의 다정함과 배려심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나 또한 다른 이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때로는 그가 나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문득 깨닫고는 한다. 세상이 각박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메말라 간다고 느낄 때마다, 그 겨울밤의 온기를 떠올리며 다시금 사람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된다. 비록 지금은 서로의 삶 속에서 멀어져 연락이 닿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내 삶의 중요한 일부이자,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따뜻한 에너지원 같은 존재다. 그의 이름은 내 마음속 작은 상자에 고이 담겨, 힘든 순간마다 나에게 조용히 힘을 실어주는 빛이 된다. 그와의 만남은 나라는 존재의 흩어진 조각들을 그러모아,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형상으로 다시 설 수 있게 도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기억을 간직하는 존재일까, 아니면 기억이 우리를 간직하는 걸까.
지우고 싶었던 사람, 남겨진 균열
반면에, 어떤 사람은 기억 속에서 지워야만 했다. 사실은 '지우고 싶었던' 이들이라고 말하는 게 훨씬 솔직한 표현일 거다. 그들에겐 이상하게도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어려운 순간에 처하면 조용히 멀어지곤 했다. 연락이 닿지 않았고, 남은 건 이유 없는 거리감뿐이었다. 늘 곁에 있는 듯했지만, 정작 내가 필요로 할 때는 그림자조차 찾기 힘들었지. 화면 너머의 침묵은 여전히 나를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무관심이 전부였다.
그런 이들과의 관계는 아주 천천히 금이 갔다. 한 번은 새벽 네 시에 눈을 떠,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가슴으로 멍하니 메시지를 남긴 적이 있다. "지금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 돌아온 건 아침 아홉 시, 너무나도 짧은 문자 한 줄이었다. "미안, 자느라 몰랐어." 그 순간, 나는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놓여 있던 균열이 내 일상 속으로 스며드는 장면을 목격했다. 멀어짐은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다가오지 않더군. 그저 아주 사소한 순간들의 반복이었을 뿐이다. 어느 날,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밤잠을 설칠 때였다. 며칠째 답장 없는 그에게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보냈지. "혹시 많이 바빠? 요즘 내가 좀 힘든데..." 다음 날 아침, '읽음' 표시는 그대로였고, 아무런 답도 오지 않았다. 그 침묵은 나에게 비로소 그가 더 이상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냉정한 확신을 주더군. 그때, 나는 조용히 확신했다. 이 관계는 끝났구나.
그들과의 관계는 마치 낡은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풀어내려 할수록 더 꼬이고, 결국은 끊어져 버리는 그런 관계였지. 처음에는 나도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혹시 내가 너무 성급했나, 내가 그들에게 부담을 주었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다. 그들의 무관심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내가 힘들 때마다 그림자처럼 사라졌고, 내가 행복할 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타나곤 했다. 그런 불균형한 관계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한 번은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내가 겪었던 힘든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내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눈앞의 기계만 들여다보고 있더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화제로 넘어가는 모습에 나는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이 관계는 더 이상 내가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구나. 그의 무심한 시선과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지워낸다고 해서 정말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떠올랐다 다시 사라지고, 또 다른 날에는 불쑥 그 이름을 불러보게 된다. 사람의 기억이란 참 야속하지. 잊어야 할 것일수록 더 오래 머무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지운 사람'**의 흔적은 망각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무시로 견뎌내는 연습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가끔 그들의 이름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괜찮아, 이제 그만 놓아도 돼." 그들을 지우려 애쓰는 과정은 결국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상실감, 배신감, 그리고 어쩌면 나의 탓일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습이었지.
그 감정을 끝까지 따라가 보았을 때, 비로소 마음에 잔잔한 숨결이 돌기 시작했다. 그들과의 거리를 두는 일은 내 안의 고요함을 다시 찾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의 감정을 존중하고, 나를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웠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들과의 단절은 나라는 존재의 불필요한 껍질을 벗겨내고, 진정한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남은 사람, 미완의 잔상
그러나 끝내 남는 사람도 있다. 좋았던 기억도, 나빴던 기억도 아닌, 그저 오래된 감정 하나가 꺼지지 않고 잔상처럼 남아 있는 사람 말이다. 이름을 불러보면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 같다가도, 비 오는 날의 냄새나 오래된 노래 한 구절에 그 사람의 말투가 문득 따라 나오곤 한다. 그리워서가 아니라, 마음 한편에 자리한 감정의 잔향 같은 존재지.
나는 아직도 어느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을 기억한다. 서로 눈이 마주쳤고,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그 순간 마음 한 귀퉁이가 싸하게 저려왔다. 반가움도 아니었고, 원망도 아니었다. 그저 "아, 그 사람이 아직 내 안에 있었구나" 하는 잔잔한 확인이었지. 말하지 못한 감정들은 그렇게 몸속에 머물다, 우연한 장면 하나에 불쑥 떠오르곤 한다. 그들은 나의 어떤 순간을 함께했던 기록이자,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관계의 미스터리다. 선명한 이름표 없이도, 내 삶의 한 부분을 조용히 차지하고 있는 존재들이지. 그 잔상은 내가 겪었던 수많은 감정의 층위를 말해주고,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복합적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어떤 관계는 영원히 알 수 없는 형태로 내 삶에 남는다.
남은 사람들은 내 삶의 알 수 없는 여백을 채워주는 존재들이다. 그들과의 관계는 정해진 틀이나 이름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깊은 감정이 얽혀 있고, 사랑이라고 하기엔 또 다른 경계가 느껴지는, 그런 모호한 관계 말이다. 어쩌면 그들은 내 삶의 특정 시기에 나타나, 나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거나, 미처 다 풀지 못한 숙제를 남기고 사라진 인연들일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오래된 팝송을 듣다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 노래를 함께 들으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사람,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알 수 없는 아련함이 밀려온다. 그리움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저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은 풍경처럼, 때로는 잔잔한 파문처럼 일렁이는 그런 감정이지.
그들은 나에게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의 한 페이지와 같다. 문득 떠오르는 그들의 모습은 내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감정의 조각들일 수도 있고, 혹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의 일부분을 비춰주는 거울일 수도 있다. 그들을 통해 나는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깊이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모든 관계가 명확한 시작과 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 어떤 인연은 영원히 알 수 없는 형태로 내 삶의 일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나라는 존재가 아직 미완의 서사를 가진, 끊임없이 채워지고 있는 그림임을 알려주는 존재들이다.
나의 기억, 나의 관계, 그리고 나
누구를 좋아했고, 누구를 지웠으며, 또 누구는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가. 이 질문은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 시절의 나를, 그 감정의 무게를 말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좋았던 사람이었겠지만, 동시에 나는 누군가에게 지우고 싶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마음은 늘 그렇게 서로 엇갈린다. 다정함이 다정함으로만 남지 않고, 무심함은 미련으로 이어지곤 하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말보다 표정이다. 따뜻함은 눈빛에 담기고, 외면은 침묵에 묻힌다. 우리는 그 얼굴들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다 잊었다고 생각한 어느 날, 문득 스친 사람 하나에 가슴이 묘하게 저려오는 것도, 아마 그런 표정 때문일 거다.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정말 좋은 기억이었을까. 아니면, 나 혼자만 그렇게 믿고 있었던 건 아닐까. 가끔은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나도 잊히지 않는 잔상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주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도, 그래도 의미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때도 있다. 그 질문은 결국 나 자신을 향한 질문이 된다. 타인의 기억 속에 내가 어떻게 남았는지를 통해, 나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완벽하지 않았던 관계들 속에서 내가 배운 것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찾는다. 관계는 거울이 아니라, 한때 내가 머물던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나를 통과해 지나간다. 나는 그 흔적 위를, 다시 걸어 나가야 할 사람이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어떤 만남은 강렬한 불꽃처럼 타올라 짧고 굵은 흔적을 남기고, 또 어떤 만남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히 스며들어 오랜 여운을 준다. 그리고 어떤 헤어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에 박히고, 어떤 헤어짐은 서서히 마르는 강물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다. 이 모든 인연의 조각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 갈 거다. 이렇듯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변화한다. 좋았던 사람들과의 기억은 우리에게 따뜻한 에너지를 주고, 지웠던 사람들과의 경험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며, 남은 사람들과의 모호한 감정은 삶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일깨워 준다. 이 모든 인연들이 나를 완성하는 소중한 퍼즐 조각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요즘이다. 기억은 흐려지지만, 감정은 더 선명해진다. 그 감정들이 만들어 낸 인연의 궤적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 한 번쯤 돌아보는 것도 괜찮다. 좋았던 사람, 지웠던 사람,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그 사람. 모두가 나였고, 모두가 내 삶이었다.
당신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지 않나요? 선명하게 떠오르거나, 아련하게 스쳐가는 얼굴 하나쯤은. 다 잊었다고 믿었지만, 어느 날 불쑥 마음 한편에서 되살아나는 그 이름. 그들은 당신에게 어떤 감정으로 남아 있나요? 좋았던 기억일 수도 있고, 말하지 못한 감정의 잔상일 수도 있겠지요. 그 사람들은 지금의 당신을 이루는, 어느 시절의 따뜻함이거나 아픔이거나, 혹은 아직 다 끝나지 않은 마음의 이야기이기도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