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편 – 인사는 마음의 빗장을 여는 말
우리가 일생 동안 내뱉는 수많은 말들은 대부분 공기 속으로 흩어지거나 시간의 흐름 속에 마모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퇴적층의 화석처럼, 특정한 순간의 온도와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마음 깊은 곳에 단단히 박힌다. 그런 말들은 삶의 굽이에서 예고 없이 나타나 불쑥, 오래된 등대처럼 빛을 발한다. 놀랍게도 그 빛은 화려한 수사나 심오한 철학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얼굴을 하고, 가장 지치고 남루한 시간의 문턱에서 조용히 건네진, 작고 따뜻한 온기를 가진 말들이다.
끝없는 야근과 영혼마저 소진시키는 의례적인 회식으로 몸과 마음이 축축한 걸레처럼 늘어지던 어느 밤이었다. 나는 거대한 도시의 익명적인 부품이 된 기분으로, 목적 없이 거리를 헤맸다. 자정을 훌쩍 넘긴 거리는 잠들지 못하는 도시의 신경질적인 소음으로 가득했다. 이리저리 비틀대는 취객들의 갈라진 고성과 아스팔트를 할퀴는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뒤엉켜, 가뜩이나 무거운 걸음을 더욱 짓눌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발길이 멈춘 곳은, 24시간 불을 밝힌 편의점, 도시의 외로운 섬이었다.
자동문이 무심하게 열리자, 바깥세상의 어둠과 혼란을 완벽히 차단하는 인공적인 백색 형광등이 눈을 시리게 파고들었다. 현란한 색의 과자 봉지들과 음료수 캔들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그곳은, 마치 세상의 모든 감정이 증발해 버린 듯한 고요한 무균실 같았다. 냉장고의 낮은 기계음만이 그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고요함에 망명한 이방인처럼, 생수 한 병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이 시대의 모든 피로를 제 어깨에 짊어진 듯한 젊은 아르바이트생이 서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은 공허한 눈, 세상의 소리를 차단하려는 듯 귀에 꽂힌 이어폰. 그는 약속된 알고리즘을 수행하는 기계의 한 부품처럼, 내 손에 들린 생수의 바코드를 찍고 거스름돈을 내밀었다. 그 모든 의무적인 동작이 끝나고, 이제 내가 돌아서면 그만인 그 찰나의 정적 속에서,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그 한마디가, 그저 평범한 다섯 글자가, 어찌 된 일인지 꽁꽁 얼어붙어 있던 마음의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처럼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목소리에는 서비스업 매뉴얼이 강요하는 상투적인 의무감도, 억지로 꾸며낸 인공적인 친절도 없었다. 다만, 비슷한 무게의 하루를 각자의 방식으로 힘겹게 버텨낸 이름 모를 동료 시민으로서의 담담한 연대감, 그 이상의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수백 마디의 화려한 위로보다 ‘당신의 고단함을 내가 알아본다’는 그 담백한 인정이, 두꺼운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내 마음의 가장 깊고 연한 곳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편의점을 나서는 내 발걸음은 들어설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인사는 그렇게, 낯선 타인이 건넨 작은 등불이 되어 칠흑 같은 도시의 밤길을 잠시나마 따스하게 밝혀주었다.
그날의 희미한 온기가 마음 한편에 남아있을 무렵, 또 다른 인사가 내 마음에 잊을 수 없는 그림을 새겼다. 어느 나른한 주말 오후, 아파트 화단 옆 벤치에 앉아 의미 없이 핸드폰 화면을 넘기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매미 울음소리가 오히려 나의 고립감을 부추기던 순간이었다. 그때 일곱 살쯤 되었을까, 작은 네발자전거를 서툴게 끌고 오던 아이가 내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아이는 낡은 운동화 끝만 바라보며 자전거 핸들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녕하세요.”
수줍음과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투, 차마 나를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에 붙박인 눈동자. 그 작은 몸짓 안에는, 그러나 세상 그 무엇보다 선하고 조심스러운 용기가 담겨 있었다. 어른이 시켜서 마지못해 따라 하는 의무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이 공간에 함께 존재하는 낯선 어른과 자신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싶었던 한 작은 인간의 진실하고 순수한 노력이었다. 그 짧은 인사 하나로, 나는 계산과 이해타산으로 가득 찬 어른들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아이의 순수한 세계에 정중히 초대받은 귀한 손님이 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언제부터 녹슬고 삐걱거렸는지도 몰랐던 내 마음의 문이, 요란한 소리 없이,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활짝 열렸다.
“인사는 마음을 여는 문이다.”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 상투적인 표현은, 그 작은 아이 덕분에 내게 살아 숨 쉬는 생생한 경험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문은 굳이 힘을 주어 밀거나, 요란하게 두드릴 필요가 없었다. 상대를 향한 진심이라는 작은 열쇠 하나면, 아주 조용하고 부드럽게 열리는 것이었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열쇠를 잃어버리고, 또 얼마나 두꺼운 자물쇠를 마음에 채우며 살아가는가.
돌이켜보면 나 역시, 한동안 인사를 잃어버린 채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마음이 지쳤다는 이유로, 하루하루가 버겁다는 핑계로, 나는 점점 더 단단하고 불투명한 껍질 속으로 숨어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나면 황급히 눈을 피했고, 붉게 변하는 층수 표시나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며 어색한 침묵을 견뎠다. 그 침묵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게와 질감을 지닌 차가운 물체처럼 어깨를 짓눌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을 쌓아 올렸다.
그 시절의 침묵은 나의 가장 가까운 룸메이트였다. 매일 같은 공간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목소리도, 사소한 습관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흐릿한 풍경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투명 인간처럼 머물렀다. ‘안녕하세요’라는 그 다섯 글자를 건네는 일이 왜 그토록 무겁고 힘들게 느껴졌을까. 어쩌면 그 말은 단순한 인사 이상의 의미, 즉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타인을 내 세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조용한 선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선언에는,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마음의 수고와 책임이 따랐다. 그 시절의 나는, 어떤 새로운 관계도 시작할 에너지가 바닥나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침묵의 성에 스스로를 가두고 익숙해질 무렵, 오래전 기억 속 한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화단 옆 벤치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내게, 조심스럽지만 세상 가장 큰 용기를 내어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던 그 아이의 작은 목소리. 메아리처럼 다시 떠오른 그 떨리는 한마디는, 견고했던 내 마음의 벽에 처음으로 가느다란 실금을 냈다. 잊고 지냈던 감각, 타인과 연결되고 싶다는 아주 근원적인 갈망이 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날 이후, 나는 인사를 의식적으로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굳어버린 마음의 근육을 다시 움직이는 재활 훈련과도 같았다. 매일 아침 청소를 시작하는 미화원 아주머니에게, 무뚝뚝한 표정의 편의점 사장님에게, 어색하게 스쳐 지나던 옆집 이웃에게, 작지만 진심을 담은 인사를 건네는 일. 처음엔 목이 타고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고, 때로는 상대가 듣지 못해 무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럴 때면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이 움츠러들었지만, 인사를 건네려고 시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안에는 아주 작지만 단단한 용기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어 아파트 현관을 통과하던 저녁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던 경비 아저씨와 마주쳤다. 이전 같았으면 가벼운 눈인사로 대신하거나, 때론 그것조차 생략했을 순간이었다. 그날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늘 무심하게 경례를 붙이던 그는, 내 목소리와 표정을 읽었는지 살짝 놀란 듯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깃들어 있던 피로의 그림자가 옅어지며 온화하고 따뜻한 미소가 번졌고, “네, 어서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다정한 말이 나를 따라왔다. 그 인사는 하루의 끝을 공식적으로 알려주는 평화로운 저녁 뉴스처럼 나를 감쌌고, 집이라는 안전한 항구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깊은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별것 아닌 듯 보였던 그 짧은 말 한마디가, 온종일 내 어깨를 짓누르던 일과 관계의 무게를 이불처럼 조용히 덮어주었다. 그것은 더 이상 일방적인 호의나 시혜가 아니었다. 서로의 수고를 알아보고, 보이지 않는 노력을 인정해 주는 조용하고도 깊은 교감이었다. 인사는 그렇게 나와 세상을 다시 연결하는 가장 작고도 위대한 실천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밤을 외롭게 건너는 존재들이지만, “수고했다”는 작은 불빛 하나, “안녕하세요”라는 따뜻한 노크 한 번으로 서로의 빗장을 열어줄 수 있음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알아간다. 그것은 가장 작은 단어로 가장 큰 다리를 놓는 일이며, 가장 조용한 목소리로 가장 오래도록 마음속에 울리는 메아리를 만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