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편 - 행복은 감각이다, 그래서 순간이다
삶, 감각의 파동 속에서
‘언제 행복했느냐’는 질문 앞에 오래 머문 적이 있다. 떠오르는 장면은 늘 흐릿했고, 무엇보다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은 주로 커다란 성공, 오랜 기다림 끝에 이룬 성취, 사랑의 결실 같은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승진, 졸업, 결혼과 같이 굵직한 삶의 이정표들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나의 경험 또한 그랬다. 오히려 사소하고 찰나의 순간이었다. 손안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지만, 너무 작고 보잘것없어 미처 행복이라 이름 붙이지 못했던 순간들. 당신도 나와 같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일상 속 작은 떨림, 그게 바로 행복
할 일 목록을 지우던 순간의 홀가분함, 예상치 못하게 받은 손편지에서 느껴진 손끝의 따스함, 며칠을 망설이다 보낸 메시지에 온 다정한 답장. 그 짧은 순간들이 내 마음속에 조용히 번져 나갔다. 완독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의 뿌듯함과 비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며 마신 따뜻한 차 한 잔에서 오는 평온함은 또 어떠했던가. 그 짧고 조용한 순간들이야말로 마음이 반응했던 때였다. 그때마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고, 아주 잠깐이지만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큰 성공이나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지극히 평범한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들은 내 신경을 미세하게 흔들고 지나가며,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면 행복은 이렇게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경험의 총합일지도 모른다.
감각, 기억을 데려오다
감각은 기억을 데려온다. 볕이 스며든 방 안의 먼지 입자가 공중에서 유영하는 모습, 손끝에 닿는 바람의 시원한 온도, 입 안에 퍼지는 구수한 국물 맛은 순간 과거의 어느 한 시절을 데려온다. 행복은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장소에서 문득 고개를 든다. 어릴 적, 겨울 저녁이면 어머니는 늘 손을 비벼가며 귤을 까주셨다. 따뜻한 난로 곁에서 반으로 갈라진 귤 조각이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새콤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때의 어머니의 온기, 귤의 향기, 그리고 나른한 저녁의 고요함. 행복은 늘 그런 식이었다. 크지 않지만, 분명히 있었다. 유년기의 아련한 장면들이 감각의 문을 통해 되살아나, 나도 모르는 새 미소 짓게 만드는 순간들이다. 이러한 감각적 기억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보물창고와 같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행복을 찾아 헤매지만, 정작 행복은 예기치 않은 순간, 익숙한 감각의 자극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는 흔히 행복을 큰 파도처럼 한 번에 밀려오는 압도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잔잔한 물결처럼 삶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세한 떨림에 가깝다.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았을 때의 아늑함, 좋아하는 음악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가슴 속 기쁨, 한낮의 햇살이 피부에 닿을 때의 따뜻함.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오감을 통해 들어와 마음속에 잔잔한 기쁨의 파동을 일으킨다. 행복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며, 우리가 얼마나 민감하게 그것을 알아차리는지에 따라 그 존재감이 달라진다.
감정의 언어로 풀어낸 도파민
행복은 감각이라는 말이 점점 더 이해된다. 감각은 말로 설명되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경험이다. 그것은 신경을 타고 오며 몸과 마음을 미세하게 흔든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몸을 통과할 때,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불빛이 켜지는 듯했다. 우리는 그 불빛에 이름을 붙여 ‘도파민’이라 부르지만, 정작 그 감각은 몸으로 기억된다. 차갑고 투명한 화학물질일지 모르지만, 삶에서는 따뜻한 감정의 이름으로 우리 곁을 맴돈다. 어떤 날은 이름 모를 설렘으로, 또 어떤 날은 문득 찾아온 평온으로. 달콤한 음식을 먹었을 때 혀끝에서 느껴지는 미각이 단순한 화학 반응이 아니라, 즐거움이라는 감각으로 확장되는 것과 같다. 그 감각은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며, 우리의 마음을 미세하게 간지럽히고, 결국에는 설명할 수 없는 충만감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뇌는 놀랍도록 복잡한 신경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파민은 그 속에서 '보상'과 '즐거움'을 관장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과학적인 사실이 우리가 느끼는 행복의 깊이와 복잡성을 모두 설명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단순히 도파민 분비로 인해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하고, 타인과 공유하면서 더욱 풍부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공들여 만든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은 단순한 도파민의 작용을 떠나, 노력의 가치와 창조의 기쁨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감각적 경험이다.
어떤 날은 일찍 눈을 떠 계획대로 하루를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한 느낌에 마음이 놓였다. 또 어떤 날은 나도 몰랐던 내 감정을 글로 풀어냈을 때,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속이 후련해졌다. 공복의 배를 채운 따뜻한 국물 한 입에 마음이 녹아내릴 때, 그 온기가 몸을 타고 퍼지며 깊은 만족감을 선사했다. 혀끝에서 퍼지는 감칠맛. 코끝을 스치는 진한 향. 목을 따라 흐르는 따뜻한 온기. 그 짧은 반응 하나가 ‘지금 여기’를 느끼게 했다. 가만히 걷는 산책길에서 바람이 볼을 스치고 간다. 볼을 지나간 바람은,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잠시 덜어내며 내 안의 속도를 늦췄다. 귓가에 속삭이는 바람 소리, 발밑에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 코끝을 간질이는 흙냄새는 온전한 휴식을 선사했다. 그 모든 순간은 보상이 아니라 반응이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대단한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말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나 자신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였을 뿐이다. 이러한 순간들은 의도적으로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삶의 흐름 속에서 불현듯 찾아온 작은 깨달음과 같았다.
일상 속의 반짝임
우리는 종종 큰 성공이나 의미 있는 일에서만 행복이 온다고 믿는다. ‘이 정도는 되어야 행복이지’라는 무의식적인 기준을 설정해 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기쁨들은 외면하곤 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렇지 않았다. 기차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간,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알 수 없는 평온함이 찾아왔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움직임과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듯 낯선 풍경들은 살아있는 그림처럼 다가와 나를 사색에 잠기게 했다. 마트 시식 코너에서 뜻밖에 맛있는 한 입을 먹었던 순간, 예상치 못한 작은 즐거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기대하지 않았던 맛의 향연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선사했다. 오래된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며 눈물이 찔끔 났던 밤, 추억 속으로 빠져들며 아련한 감동을 느꼈다. 멜로디와 가사 속에 담긴 지난 시간의 이야기들은 내 이야기처럼 다가와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다. 모두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이게 뭐라고’ 싶은 순간이, 삶을 조용히 반짝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순간들은 우리가 행복을 바라보는 시야를 확장시켜 준다. 행복은 대단한 목표 달성의 결과물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감각의 총합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행복은 어쩌면 우리가 얼마나 작은 것에 감사하고, 얼마나 현재에 집중하는지에 따라 그 크기가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의 향기, 퇴근길 노을 진 하늘의 아름다움, 친구와의 짧은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유대감. 이 모든 것들은 눈에 띄지 않게 우리 삶의 조각들을 채워나가는 작은 행복의 조각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조각들을 모으고 연결하며, 비로소 자신만의 행복이라는 퍼즐을 완성해나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작은 조각들을 단순히 지나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의미와 감각을 온전히 느끼려 노력하는 자세일 것이다.
도파민이라는 단어는 과학의 언어일지 몰라도, 우리의 삶에선 그것이 감정과 이어진다. 말없이 옆에 앉아 있는 고양이의 따뜻한 체온,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그 작은 존재감은 위로가 된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 규칙적인 숨소리, 그리고 말없이 건네는 교감은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강력한 안정을 준다. 산책 중 마주친 꽃 한 송이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아름다움, 작은 꽃잎 하나하나에 담긴 경이로움에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진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화려한 색감이 눈을 즐겁게 하며, 한 송이 꽃이 품고 있는 생명력에 압도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주고받은 댓글 하나가 남긴 따뜻한 흔적, 익명의 타인이 건넨 공감과 지지는 예상치 못한 기쁨을 안겨준다. 화면 너머의 누군가가 나의 글에 공감하고 위로를 건넬 때, 세상은 훨씬 따뜻하고 연결된 공간으로 느껴진다. 그건 도파민이었고, 감각이었고, 결국 행복이었다. 행복은 우리 주변의 아주 작고 평범한 대상들을 통해 우리에게 스며든다. 우리가 얼마나 주의 깊게 세상을 바라보고, 작은 것들에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는지에 따라 행복의 순간들은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
발견하고, 머무르다
그래서 행복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큰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 지쳐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와 함께 존재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무수히 많은 ‘행복의 순간’을 지나치고 있는 건 아닐까. 너무 바쁘게 살아가느라, 혹은 너무 대단한 행복만을 추구하느라, 이미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작은 행복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멀리 있는 이상향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저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다면 말이다.
우리는 삶의 속도를 늦추고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쫓아가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것들은 놓치고 지나칠 때가 많다. 잠시 멈춰 서서 따뜻한 햇살을 느끼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지극히 평범한 행위들이야말로 우리 내면의 평온과 연결되고,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하는 통로가 된다. 행복은 어떤 도착점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가 느끼는 미세한 감각의 총체이다.
조용히 나를 흔들고 간 장면들이 있다. 아무도 몰랐지만 나만은 분명히 느낀 감정의 떨림. 행복이 무엇인지 묻던 나는, 지금은 작은 향기에 마음을 기대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맑은 날 아침 햇살이 창틈으로 스며들어 방안을 환하게 밝히듯이, 행복은 예고 없이 찾아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인다.
머물지도, 증명되지도 않지만. 지나가며 마음 어딘가에 은근히 스며드는 감각. 그것을 나는, 행복이라 부른다.
지금 당신 안에서,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어쩌면 행복의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행복은 말없이 지나가며 우리 안에 잔잔한 파동을 남긴다.
우리는 종종 지나간 순간을 ‘행복’이라 부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 감각은 지금도 여기에 머물고 있었는지 모른다. 말없이 다가와, 조용히 흔들고, 천천히 사라지는 어떤 감정. 그 자리에 남겨진 미세한 떨림이 바로, 나를 지탱하는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