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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거리》

40편 –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by 정성균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 수 있을까?

한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길 바랐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 간절한 바람은 언제나 엇갈려, 오해의 씨앗을 뿌리고 깊은 상처로 남곤 했다. 가까운 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에 갇히기 쉬웠다. 마치 오랜 친구라면 나의 침묵 속 의미까지 헤아려야 한다고 믿었고, 가족이라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 깊이 느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허상에 불과했다. 매번 미묘한 감정의 엇갈림이 생겨났고, 작은 표정 하나에 담긴 내밀한 의미를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할 때마다 서운함은 켜켜이 쌓여갔다. 결국 그 서운함은 불필요한 벽을 쌓아 올렸고, 오랫동안 이어진 관계마저 위태롭게 흔들었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되더라. '과연 나 또한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려 노력했던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랐던 그 시절은, 그렇게 잔잔한 깨달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해는 느리게 도착한다

가만히 떠올려보면, 이해는 말 몇 마디로 닿지 않았다. 누군가의 말끝을 기다려주는 태도, 끝내 설명하지 못한 마음까지도 다그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는 침묵. 그런 장면들 안에 비로소 이해가 스며 있었다. 재촉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며, 오직 상대방의 속도에 맞춰 걸어가는 행위. 그것이 진정한 이해의 시작이었다.


이해는 판단보다 늦게 도착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린다. 찰나의 순간에 상대의 말투 하나로 기분을 짐작하고, 스쳐 지나가는 표정 하나로 그 의도를 가늠한다. 그러나 감정은 늘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다르고, 말은 종종 마음을 감추는 데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불평을 쏟아낼 때 우리는 그저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고 단정 짓기 쉽다. 하지만 그 불평 뒤에는 사실 오랜 시간 쌓인 좌절감이나 해소되지 못한 무력감이 숨어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언어의 표면만을 읽고 성급히 판단을 내리는 순간, 우리는 이해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린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공감을 타인의 세계를 그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라 했다. 관점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 맺어온 관계의 방식, 깊어진 상처의 결을 함께 상상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였다.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는 것처럼, 그의 삶의 맥락 속에서 그가 보고 느끼는 것을 경험하려는 노력. 그것이 공감의 본질이다. 그러니 진짜 이해는, 상대의 내면까지 조심스레 건너가는 느린 행위다. 그 길에는 오랜 경청과 많은 물음, 그리고 끝내 말하지 못한 진심을 받아들이는 여백이 필요했다. 상대방이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의 덩어리, 혹은 아직 자신조차 명확히 규정하지 못한 모호한 생각들까지도, 우리는 판단 없이 그저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이 과정은 마치 복잡한 지도를 해독하듯, 상대방의 내면을 겹겹이 쌓인 의미와 감정의 층위로 바라보는 섬세한 작업이다. 이해는 판단보다 언제나 늦게 온다.


오해의 흔적,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

예전에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늘 냉소적이었고, 비꼬는 말로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고, 자연히 그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든 말이 날카로운 비수로 느껴졌고,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나를 위협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그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불편함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멀어지려 애썼고, 그와의 관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려 했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를 '성격이 나쁜 사람' 혹은 '부정적인 사람'으로 분류하고 내 마음속의 벽을 더욱 높이 쌓았다.


몇 해 뒤, 우연히 그의 어린 시절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반복된 방임과 강압,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그의 이야기는 단편적인 정보가 아니라, 뿌리 깊은 상처와 생존의 역사를 보여주었다. 그의 말투는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방식이었고, 그 냉소는 상처받지 않기 위한 처절한 방어였다.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의 삶의 조각들이 맞춰지면서, 이전에 내가 보았던 그의 행동들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빠르게 누군가를 규정해버렸는지 깨달았다. 그의 행동을 단순한 성격적 결함으로 치부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사연들을 전혀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주했다. 나의 성급한 판단이 얼마나 큰 오해를 낳았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해는 그렇게 뒤늦게 찾아왔다. 이미 멀어진 사이, 이미 끝나버린 관계 뒤에 조용히 찾아왔다. 그래서 더 아리고, 더 잊히지 않는다. 후회와 아쉬움의 감정이 뒤섞여 마음속에 깊은 자국을 남긴다. 그와의 관계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그를 이해하게 된 사실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어쩌면 그 순간 그를 이해했다면, 우리의 관계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뒤늦게 찾아온 이해는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미래의 나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더 신중해져야 한다는 깨달음. 이 교훈은 이후 나의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성급한 단정 대신, 호기심을 가지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더 깊이 들으려 노력하게 되었다.


곁에 머무는 조용한 다짐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설명을 생략해도 되는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설명을 천천히 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주는 일이다. 더듬는 말들을 기다려주는 일, 실수를 탓하기보다 그 이면을 살펴보는 일.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표현할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불완전함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다. 마치 어린아이가 서툰 그림을 그려 보일 때, 그 서툰 표현 자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듯, 상대의 미숙함까지도 포용하는 마음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해가 함께 세상에 머무는 조건"이라 했다. 이 말은 말없이 공감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한 채 머물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 속에서 함께 존재하려는 의지. 내가 상대방과 완전히 같아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의 고유한 세계를 존중하며 곁에 머무는 행위다. 때로는 우리가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할 때, 우리의 잣대로 그를 재단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나라면 저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저건 비합리적인 행동이야'와 같은 생각들. 그러나 진정한 이해는 그러한 판단을 유보하고, 상대의 '다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가끔은 설명되지 않는 감정도 있다. 말로 꺼내지 못하는 고통도 있다. 이해하려는 태도는, 곁에 남기로 한 조용한 다짐이기도 했다. 가볍게 “나도 알아” 말하기보다, “나는 잘 몰라. 하지만 곁에 있을게.” 말할 수 있는 용기였다. 알지 못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존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 이 용기는 상대에게 깊은 안정감을 주며, 그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면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한다.


내가 누군가를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나의 좁은 시야와 성급한 판단이 초래한 결과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곧, 미안함이 따라왔다. 내가 그의 입장을 조금 더 일찍 헤아렸더라면, 그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미안함. 그런 감정들이 지나고 나면, 그제야 조심스레 다가가는 마음이 생긴다. 그 과정이 곧 깊은 이해였다.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해 타인의 입장을 다시 생각하고, 그에게 다가가려는 노력. 이 과정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기 점검과 재조정의 연속이다.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기술

이해는 지식이 아니라 태도다. 설득이 아니라 기다림이고, 설명이 아니라 들어줌이다. 누군가의 서툰 말과 억눌린 감정을 존중하는 것. 그들이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관계는 다시 시작된다.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연결은 상대방이 자신의 존재와 감정을 존중받고 있음을 느낄 때 가장 강렬해진다. 마치 엉킨 실타래를 풀 듯, 끈기 있게 기다리고 들어주는 태도가 관계의 매듭을 다시 풀어낸다.


이해는 무언가를 고치기보다,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기술이다. 조용한 밤, 혼자 울고 있는 사람 곁에 조용히 앉아 있는 일이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행위. 때로는 말 한마디보다 깊은 침묵이 더 큰 공감을 전한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사람에게 “괜찮아, 그 마음” 건네는 일이다.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그가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수용하고 지지해주는 것. 그의 아픔을 나누어 지고, 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이는 상대를 약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을 찾아주기도 한다.


이제 나는 이해한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대충 안다고 단정 짓는 대신,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먼저 한다. 대신 “조금은 알 것 같아”, “그랬구나”, “말해줘서 고마워” 같은 말들이 늘었다. 이 말들에는 내가 다 알지 못해도, 알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내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너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싶다는 진심이 담겨 있다. 그 마음은 이해보다 더 따뜻하게 전해진다.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해하려는 진심 어린 노력 자체가 관계를 단단하게 만든다.


우리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각자 고유한 경험과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에, 타인의 내면을 100%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도 깊은 위로가 된다.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었는지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은, 절대 쉽게 말하지 않는다.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섣부른 조언을 건네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그 자리에 머물며,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의 감정을 헤아리려 노력한다. 그 진심 어린 노력이 관계를 더욱 깊고 의미 있게 만든다. 우리는 결코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서로를 이해하려는 여정 속에서 더 깊은 공감과 유대를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여정 자체가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이해하려는 그 마음이 우리를 단단히 이어준다. 오늘 하루, 당신도 누군가에게 조용히 기대어 쉴 수 있는 그런 존재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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