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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거리》

48편 - 반응하지 않고 기다리는 문장들

by 정성균

밖을 훑던 감각, 안으로 스며드는 시간

삶의 여정 속에서 창작의 원동력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한때 영감은 외부에서 번개처럼 찾아오는 신비로운 순간으로 여겼다. 젊은 시절, 세상 모든 것이 곧 영감의 샘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 우연히 들려온 노랫말 한 줄, 길거리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마음속에 불꽃이 일었고, 이는 곧바로 글과 그림, 음악으로 이어지는 폭발적인 에너지로 작용했다. 내면에 거대한 스파크가 튀는 듯한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감흥의 물결이 나를 지배했고, 그 강렬함은 망설임 없이 창작의 연료가 되었다. 당시 나는 세상의 표면을 끊임없이 훑으며, 매 순간 반짝이는 영감의 조각들을 뒤쫓았다. 세상 모든 자극이 신선한 충격이었고, 모든 발견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으며, 이 경험들이 즉각적으로 글과 사상으로 변모하는 역동의 시기였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격렬했던 반응들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전처럼 쉽게 감탄하거나, 사소한 것에 놀라지 않게 되었고, 외부 자극에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변화가 나이 듦의 징후, 혹은 창조적 활력의 고갈을 알리는 비극적인 신호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마치 샘물이 마르듯, 내 안의 창조적 에너지가 소멸하는 듯한 불안감이 엄습했지. 하지만 시간은 더 흘러,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결코 둔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이 스며들고, 안으로 침잠하는 심화의 과정이었다. 피상적인 감각에 머물지 않고, 심층적인 이해와 통찰로 향하는 변화였다.


감정은 묵혀야 깊어진다

이제 외부 자극을 받을 때, 나는 즉각적인 응답 대신 그 자극이 마음속 깊이 가라앉을 시간을 허락한다. 이는 흡사 흙탕물이 가라앉아 맑아지는 과정과 같다. 느낌이 내 안에서 차분히 머무르며 시간을 들여 묵혀 보고, 며칠이고 조용히 지켜보는 인내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무르익은 느낌은 과거의 번개 같던 번뜩임과는 다른, 훨씬 더 단단하고 오래 지속되는 힘을 가졌다. 이제 영감은 겉으로 번뜩이는 섬광이 아니라, 내 안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뿌리내리는 고요하고 견고한 흐름이 되었다. 순간적인 휘발성을 넘어, 시간과 함께 숙성되는 깊은 맛과 향을 지니게 된 것이지. 마치 심호흡을 하듯, 이제는 깨달음 또한 서두르지 않는다. 과거에는 얕은 호흡으로 자극을 삼켰다면, 지금은 깊은 들숨 속에 느낌을 녹여내며 그 본질을 탐구한다. 이는 현상 너머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더 깊이 탐색하려는 변화의 발자취다.


이러한 변화의 자취는 삶의 여러 영역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며칠 전, 서랍 깊은 곳을 정리하다 오래된 노트 하나를 발견했다.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손때 묻은 표지를 넘기다 문득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가만히 바라보는 일에도 이유가 있다.'놀랍게도 그 문장은 스무 살 무렵 내가 쓴 것이었다. 당시 어떤 맥락에서 이 글을 적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현재의 나는 그 한 줄의 문장을 통해 글을 쓰고 있었다. 젊은 날의 내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어쩌면 무심코 흘려 썼을 조용한 글귀 하나가 오랜 시간이 흘러 내 삶을 지탱하고, 나의 철학을 대변하는 굳건한 말이 되어 있었다. 이 깨달음은 번뜩임이라는 것이 때로는 그 순간의 강렬한 느낌이 아닌, 훗날 돌아보는 고요하고 심오한 시선 속에서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되찾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과거의 작은 조약돌 하나가 오랜 시간이 지나 보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이 빠를수록, 나는 느리게

스무 살의 나는 새벽까지 영화를 몰아보며 느낌의 파도에 온몸을 내맡겼다. 반면 현재의 나는,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 앞에 앉아 몇 시간 동안 말없이 시간을 건넨다. 느낌이 밀려오는 방식이 달라졌고, 그 밀도의 방향 또한 달라졌다. 카페 창가에 앉아 찻잔을 들고 바깥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지나가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흐름을 지켜보았다. 그때 문득 떠오른 말, '지금 이 느림도 삶이다.'메모장에 적어두고 며칠이 지나서야 그 한 줄이 하나의 문단으로 피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내가 둔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와 존재의 깊이가 달라졌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수만 개의 자극 속을 스쳐 지나간다. 스마트폰 화면을 가득 채우는 수십 개의 알림, 끊임없이 재생되는 짧은 영상들, 끝없이 이어지는 소셜 미디어 피드 속에서 우리의 감각은 멈출 틈 없이 요동친다. 우리는 생각할 여유 없이 반응하고, 제대로 기록하기 전에 성급히 공유하며, 타인의 시선과 빠른 인정에 목마르다. 인간의 섬세한 감각이 아닌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을 유도하고, 즉각적이고 빠른 반응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우리는 산다. 지금 우리는 '느낀다'는 감각마저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를 살아간다. 반응은 많지만, 반추는 적은 시대다. 그러나 그 빠른 흐름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내 진정한 감각의 뿌리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잊게 되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피상적인 자극에만 반응하며 정작 안쪽의 소리는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느림은 방향을 되찾는 일

현재의 나는 이 시대의 빠른 흐름 속에서 다르게 감지하고, 다르게 반응하고 싶다. 빨리 써내지 않아도, 자주 공유하지 않아도, 내 안에서 서서히 무르익는 언어와 느낌이 사라지지 않도록 굳건히 지키고 싶다. 어떤 이는 이러한 나의 태도를 '느린 삶'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성과주의와 속도 지향적인 사회에서 뒤처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나만의 '리듬'이자, 나만의 '성장 방식'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이제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피상적인 감동이나 인정보다는, 내 안에서 깊이 무르익는 진정한 느낌 하나를 더 오래 들여다보고, 숙성시키고 싶다. 외부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오롯이 나 자신의 안쪽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이는 곧 자기 존중과 진정성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주목받는 자리를 갈망하고, 세상의 한가운데서 빛나기를 원했지만, 이제는 시끄러운 모임보다는 조용한 창가를 택하게 되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간결하고 진정성 있는 문장을 쓰게 된다. 누군가를 인위적으로 감동시키려는 과한 시도보다는, 스스로를 설득하고 위로하기 위한 진심 어린 언어를 골라내는 법을 배운다. 깨달음이 찾아와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이제는 예전처럼 성급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그 말들이 내 안에서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고 숙성되는지 조용히 지켜보고 싶어졌다. 그것은 마치 씨앗이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는 과정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것과 같다."나는 왜 오늘도 천천히 걸을까?"이 질문은 걷는 행위에 대한 의문이 아닌, 삶의 속도와 방향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영감은 눈앞이 아닌 뿌리에서 자란다

젊은 날의 깨달음은 하늘에서 번쩍 떨어지는 강렬한 불꽃같았다. 눈앞을 환하게 비추지만, 그 빛은 빠르게 사라지는 휘발적인 것이었다. 그때는 그 순간의 강렬함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의 영감은 땅속 깊이 보이지 않게 뻗어가는 뿌리처럼 느껴진다. 그 뿌리는 혹독한 계절의 변화를 묵묵히 견뎌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생명의 방향을 바꾸고, 거대한 나무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겉으로는 고요하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쌓이는 감각의 층위는 훨씬 더 깊고 진하며, 견고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는 안쪽의 깊은 울림에 귀 기울이게 된 것이다. 이는 즉흥적인 반응과 숙성된 사유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영감을 '느끼는 것'에서 '들여다보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감각의 불꽃이 아니라, 느낌의 깊이를 천천히 통과하는 침잠의 리듬이다.


나는 이제 기다릴 수 있다. 바로 써내지 않아도 괜찮고, 느낌이 익을 때까지 지켜볼 수 있다. 진정한 감흥은 찰나의 속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숙성을 통한 밀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제는 깊이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느리고 깊어지는 방식이 나이 듦의 한 모습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 느림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조바심이나 불안함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지혜와 깊은 성찰이 더해지는 아름다운 과정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했지만, 나는 그 침묵 속에서도 말이 자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감은 바로 그 틈, 말과 말 사이의 고요에서 태어난다.


말 없는 시간에 문장은 피어난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더 적게 말하고, 더 많이 침묵할 것이다. 더 자주 걷고, 더 오래 바라볼 것이다. 그 느린 리듬 속에서 문장이 스스로 피어나기를 기다릴 것이다. 말로 다 하지 않아도, 글로는 닿을 수 있으니까. 영감은 그 틈을 기다린다. 이처럼 나이가 들면서 영감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변화했다. 예전에는 적극적으로 깨달음을 찾아 헤맸다면, 이제는 그것이 찾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며 안에서 숙성시키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 사회의 과도한 정보와 자극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로 향하며, 안쪽의 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을 잃어간다. 영감을 즉각적인 소비재처럼 다루며, 그 깊이와 진정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창작과 의미 있는 삶은 외부의 화려함이 아닌, 내면의 고요함과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이 듦은 가르쳐주었다. 이 느림의 미학은 게으름이 아니라, 삶의 본질과 창작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하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이제 나는 영감을 쫓는 대신, 영감이 나를 찾아오도록 허락한다. 그것은 성급한 욕망이 아닌, 무르익은 기다림에서 오는 충만함이다. 마치 씨앗이 땅속에서 인내하며 뿌리를 내리듯, 나의 영감 또한 깊은 내면에서 조용히 자라나 견고한 형태로 발현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내 삶을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들 것이며, 세상의 빠른 흐름 속에서도 나만의 고유한 리듬을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결국 나이 듦은 영감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고 경험하게 하는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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