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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거리》

49편 - 관계를 추론하는 마음의 기술

by 정성균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믿었을 때, 우리는 종종 착각의 덫에 걸린다. 오래된 친구, 가족, 가까운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상대의 눈빛이나 짧은 문장 속 공백만으로도 마음을 추측하고 해석하며, 이내 단정 짓곤 한다. 익숙함의 힘이라 믿으면서도, 문득 전혀 다른 마음을 마주할 때면 익숙함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생략하고 오해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서로를 안다고 착각하기 쉬워지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 바로 우리가 놓인 현실이다.


표정과 말투, 사소한 단서로 그린 감정의 지도

말하지 않은 마음은 그 복잡함만큼이나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그 복잡함을 생략한 채 몇 개의 작은 단서로 상대의 마음을 유추한다. 평소보다 무뚝뚝한 말투, 며칠 동안 오지 않은 메시지, 혹은 함께 있을 때 멍하니 딴생각하는 표정 같은 것들. 이런 파편적인 정보들을 모아 점묘화를 그리듯 상대의 마음 전체 지도를 완성하려 한다. 그러나 이 지도는 실제와는 다른, 왜곡된 모습을 띠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의 감정 추론 방식은 생각보다 훨씬 주관적이고 오류에 취약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추론하는 일은 어쩌면 모든 관계에서 매일 반복되는 내면의 작업이다. 상대를 이해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이 '그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표정의 진짜 의미는 뭘까?', '나를 향한 그 무심함 속에는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 걸까?'와 같은 질문으로 이끌지만, 때로는 이 질문들이 우리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도 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는 심리적 함정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때 종종 귀납적 추론(inductive reasoning) 방식을 사용한다. 반복된 경험에서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하려는 경향인데, 예를 들어 상대방이 미소를 보이면 '나를 좋아하는구나', 피로한 표정을 지으면 '나에게 관심이 없구나'와 같이 단정 짓는 식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늘 정확하지 않다. 감정은 상황만큼 복잡하고, 사람의 내면은 하나의 결론으로 닫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피곤해서 말이 없거나, 자신의 고민에 깊이 빠져 있어 무뚝뚝하게 보일 뿐인데도 '싫어한다'거나 '관심이 없다'는 오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오해는 관계에 불필요한 장벽을 만들고, 심지어는 상대를 향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 관계를 손상시키기도 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도 한다. 리처드 니스벳은 확증 편향을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기 위해 정보를 선택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이미 형성된 자신의 가설이나 믿음을 뒷받침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관계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조립한다. '저 사람은 원래 이래', '내가 생각했던 대로군' 같은 생각들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 편향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에도 작용하며, 특히 친밀한 관계에서 더욱 뿌리 깊게 나타난다. 우리는 관계가 깊을수록 '나는 너를 안다'는 믿음 아래, 예상에 부합하는 단서들만 수집하며 관계의 실체를 왜곡할 수 있다. 결국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때로는 내 기준에서만 짜인 '정답 찾기'로 변질되기도 한다.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해석하려는 강력한 심리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믿음이라는 프레임이 관계를 왜곡할 때

반대로, 강한 믿음에서 출발한 연역적 추론(deductive reasoning)도 있다. 특히 애착 관계에서는 귀납적 추론과 연역적 추론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서로 다른 해석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는 나를 좋아해"라는 전제를 두고 상대방의 모든 행동을 그 프레임 안에서 해석하는 식이다. 연락이 늦어도 '바빠서 그렇겠지', 말이 거칠어도 '원래 표현이 서툰 사람'이라며 자기 방식대로 이해하려 든다. 이러한 추론 방식은 긍정적인 관계 유지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 위험성 또한 크다. 상대방의 실제 감정이나 의도를 무시한 채 자신만의 해석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상대의 진심을 놓치게 만들고, 스스로 감정의 늪에 빠져드는 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은 관계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의 인지적 틀(cognitive framework) 안에 타인을 가두려 하는 것과 같다. 이 프레임이 너무 견고하면, 상대방의 실제 감정이나 의도는 그 프레임 밖에서 맴돌 뿐, 결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심지어 상대방이 명확하게 '아니다'라고 말해도, 우리는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다른 뜻이 있을 거야'라며 자신의 프레임을 고수하려 한다. 이러한 일방적인 해석은 결국 관계의 소통을 단절시키고 깊은 오해의 골을 만들 수 있다. 관계는 양방향 소통을 통해 형성되는 것인데, 일방적인 추론은 그 소통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이처럼 우리는 때로는 합리적 사고보다는 감정적 편향에 의해 지배당하며, 이는 관계의 건전한 성장을 저해하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후배와의 오해, 그리고 오판이 남긴 감정의 거리

예전에 함께 일하던 후배가 있었다. 처음에는 매우 적극적이고 밝았는데, 어느 날부터 나에게 눈을 잘 마주치지 않고 회의에서도 묘하게 거리를 두는 듯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내가 뭔가 실수했나, 불편하게 한 건가', 아니면 '나를 피하고 싶은가' 하는 여러 결론을 내려보았다. 내심 서운한 감정마저 들었지.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 들은 이야기는 의외였다. 그 후배는 당시 가족 문제로 몹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오히려 내가 편안해서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말을 아꼈다는 것이다. 자신의 취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 나에게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 추론은 정확했지만, 전혀 맞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의 추론은 때때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곤 한다. 하나의 단편적인 정보로 전체를 판단하려는 경향, 그리고 그 판단이 맞다고 굳게 믿어버리는 경향이 우리의 관계를 얼마나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감정은 흐르고 바뀌기에, 유보와 관찰의 기술이 필요하다

추론은 결국 해석이다. 문제는 그 해석이 언제나 옳지 않다는 데 있다. 감정은 고정된 공식이 아니라 흐르는 물 같은 것이다. 매 순간 새롭게 생성되고, 그때그때 달라진다. 한 사람이 오늘 느끼는 감정과 내일의 감정은 서로 다른 결을 가질 수 있고, 어제의 말이 오늘의 마음을 대변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의 감정은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며, 시간과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복잡한 시스템이다. 어제의 기분이 오늘까지 이어지지 않을 수 있고, 오늘 내뱉은 말이 내일이면 후회될 수도 있다. 그러니, 관계를 추론하는 기술이란 '정답을 찾는 기술'이 아니라 '다시 질문할 수 있는 여백'이 아닐까 싶다. 정답을 찾으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언제든 다시 질문하고 확인하며 관계를 재조정할 수 있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


즉각적인 해석보다 한 걸음 늦추는 마음의 연습

한때 나는 타인의 마음을 너무 쉽게 판단하려 했다. 그 사람의 말투, 얼굴, 행동에서 정답을 찾으려 했고, 그 정답을 바탕으로 마음을 조정하거나 거리를 두기도 했다.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저 사람은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단정 지었다. 그리고 그 단정은 종종 나의 불안감이나 낮은 자존감과 결합되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상대방의 의도를 확인하기보다는, 내가 이미 내린 결론에 맞춰 그 관계를 재단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방식이 오히려 관계를 더 멀어지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다. 내 해석은 나의 경험과 선입견의 굴절을 통과한 것이었고, 상대의 진심과는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심지어 상대방이 나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나의 잘못된 추론은 그 관계를 냉랭하게 만들고 벽을 세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이제는 한 발 늦게 판단하려 한다. 눈에 보이는 단서를 정리하기보다, 말하지 않은 마음에 더 오래 머물러보려 한다. 조심스럽게 묻고, 기다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상대방의 행동이나 말 뒤에 숨겨진 진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성급히 결론 내리지 않고,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관찰하고 경청하는 것이다. 추론보다 더 어려운 일은 그 추론을 유보하는 태도라는 걸, 그 과정을 통해 알게 됐다. 이는 일종의 정서적 지연(emotional delay)이며, 심리학에서 정서적 지연은 감정 반응을 즉시 표출하기보다 잠시 유보함으로써 충동적인 해석을 줄이고 더 정교한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조절 전략을 의미한다. 이 기술은 특히 오해 가능성이 높은 인간관계에서 '내 감정이 곧 진실'이라는 오류를 막는 데 유용하다. 즉각적인 반응이나 해석 대신, 한 걸음 물러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지연은 단순히 반응을 늦추는 것을 넘어, 우리의 감정적 지능을 높이고 타인의 복잡한 내면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역량이다.


관계는 분석이 아니라 동행이며, 수용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관계는 때로 수수께끼 같고, 때로 예술처럼 섬세하다. 정확한 해답이 없기에 더 많이 엇갈리고, 그래서 더 많이 배운다. 인간관계는 고정된 방정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생명체와 같다. 우리가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새로운 측면이 드러나거나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논리로 다다를 수 없는 마음의 세계를 조용히 동행해 보는 일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정복'하거나 '해독'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그저 그들의 감정 흐름을 따라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결국 관계는 '정확한 분석'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공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를 기준으로 누군가를 설명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시간과 감정의 리듬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연습. 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사람의 감정을 내면화해 보려는 노력이 진정한 이해의 시작이다. 이는 단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를 넘어, 상대방의 고유한 경험과 감정의 결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어쩌면 이것이 관계를 추론하는 데 있어 가장 깊고 단단한 기술 아닐까 싶다.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할지라도, 끊임없이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상대방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 또한 깊이 들여다보게 되며, 이는 자기 이해와 성숙으로 이어진다.


진짜 이해는 듣는 기술보다 기다리는 태도에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믿었던 나는, 이제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먼저 헤아리려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상대방의 침묵이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깊은 고민이나 표현의 어려움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기다려주는 마음. 침묵은 때론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될 수도 있고, 때론 깊은 신뢰의 표현일 수도 있다. 섣부른 판단으로 관계를 재단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내면을 존중하고 그들이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인내하는 태도가 진정한 소통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침묵의 언어를 읽으려는 노력은 상대방에게 '나는 당신을 존중하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오해가 아닌 존중과 신뢰로 마음의 간극을 메워가는 길

그 변화는 기술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고, 결국 마음을 해석하는 방식이 그 사람과 내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관계의 진정한 깊이는 완벽한 이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노력과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상호 존중과 신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이다. 오해와 단정으로 생겨난 마음의 간극은 오직 진정한 관심과 인내, 그리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태도를 통해서만 메워질 수 있다. 우리가 서로의 마음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유보하고, 그리고 온전히 동행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마음과 마음 사이의 진정한 거리가 좁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섬과 섬 사이를 잇는 다리와 같아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놓일 때 비로소 견고한 연결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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