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소음이 제자리를 찾아 잠든 시간,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제 몸을 거두면 비로소 저의 우주가 열립니다. 분주했던 하루의 관성을 벗어던진 아파트의 정적 속, 희미한 스탠드 불빛만이 저와 하얀 화면 사이의 길을 밝힙니다. 기대와 고독을 머금은 채 깜빡이는 커서는 살아있는 심장처럼, 문장이 태어날 진통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이곳은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감각이 만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저만의 연금술 공간입니다.
제 글은 천재의 번뜩이는 영감이 아닌, 시간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기억의 파편들로부터 발굴됩니다. 서랍 깊은 곳에서 빛바랜 채 잠자던 메모들, 사무실 책상 한편에 흘려 적은 단상, 밤새 밑줄 그으며 읽었던 책갈피마다 스며든 위대한 문장들이 제 글의 견고한 뼈대를 이룹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네모난 모니터 앞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삶은, 책에서 얻은 사유의 깊이를 통해 비로소 특별한 이야기의 원석을 품은 광산으로 변모합니다.
책 속의 문장들은 제 안으로 들어와 죽은 활자가 아닌, 세상을 감각하는 새로운 눈과 귀가 되어주었습니다. 위대한 작가들의 고뇌와 지혜를 자양분 삼아, 저는 삭막한 사무실 창가에 놓인 화분의 마른 잎에서도 생의 의지를 발견하고, 텅 빈 복도를 가르는 구두 소리에서 한 인간의 삶의 무게를 읽어냅니다. 독서는 세상을 더 깊이 사랑하는 법을, 글쓰기는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법을 가르쳐준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렇게 길어 올린 시간의 흔적들은, 진솔한 경험이라는 고운 체에 밭쳐져 한 편의 에세이로 정제됩니다. 평범한 풍경 속에 숨겨진 의미의 결을 발견하고, 그것에 가장 가까운 언어의 옷을 입히는 일. 때로는 단어 하나를 찾지 못해 텅 빈 밤의 심연으로 가라앉기도 하고, 세상에 내보일 용기가 없어 써 내려간 문장들을 재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담금질 속에서 글은 단단해지고, 독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두드릴 힘을 얻습니다. 브런치스토리에 쌓이는 글과 함께 늘어나는 구독자의 수는, 제 고독한 항해에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는 따뜻한 증표입니다.
수많은 격려 중에서도 며칠 전 새벽에 만난 한 문장은 지금도 제 심장을 뛰게 합니다. 스레드에서 ‘자비문’이라는 이름으로 만난 한 스친(스레드 친구)께서 남겨주신 “다시 읽고, 또 읽고 했어요.”라는 진솔한 고백. 그 문장과 함께 보내주신 세 개의 엄지척과 하트 이모지는, 제 모든 밤샘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화면 너머, 알 수 없는 공간의 한 사람이 제 글을 몇 번이고 되새겨 읽었다는 사실 앞에서, 저는 진심만이 가닿을 수 있는 영혼의 악수를 경험했습니다.
만약 그 악수가 제게 건네진 직접적인 위로였다면, 얼마 전 발견한 ‘우리봄비’라는 스친님의 블로그는 제 글이 저의 손을 떠나 스스로의 생명을 얻어 세상 속을 걸어가고 있음을 보여준 경이로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공간에 저를 ‘좋아하는 브런치 작가’라 소개하며, 제 글이 자신의 고민하던 주제를 섬세하게 어루만져 주었고, 그 속에서 많은 힘을 얻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받았던 그 위로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다는 문장으로 글을 맺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 작은 창가에서 써 내려간 이야기가 한 사람의 우주를 건너, 또 다른 누군가의 우주를 향해 떠나는 장엄한 여정을 목격했습니다.
그 빛나는 마음들 앞에서 저는 종종 미안함을 느낍니다. 보내주시는 다정한 댓글 하나하나에 제 마음을 담아 답하고 싶지만, 낮 시간의 굴레에 묶인 몸은 늘 더디기만 합니다. 사무실의 불빛 아래에서 저는 독자들의 다정한 안부를 떠올립니다. 제때 화답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고스란히 빚이 되어, 다음 글을 써 내려가는 신성한 책무가 됩니다.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기억하며, 더 깊고 정직한 문장으로 그 마음에 보답하는 것이 저의 가장 진실한 답신이라 믿습니다.
글쓰기는 결국 나 자신과 맺는 가장 성실한 약속이며,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내면을 지키는 가장 견고한 성채입니다. 매일의 꾸준함으로 단련되는 영혼의 근육이며, 더 나은 문장으로 세상과 소통하고픈 단단한 욕심이 지펴내는 불꽃입니다. 그것은 삶의 허무를 이겨내는 가장 진실한 기도이며,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하는 숭고한 의식입니다.
오늘도 도시의 창밖으로 불빛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채 반짝입니다. 저 또한 제 안의 이야기들을 정성껏 엮어 세상이라는 광장으로 한 편의 글을 띄워 보냅니다. 이 글이 누구의 마음에 가닿아 어떤 풍경을 그려낼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저는 이곳, 지방의 작은 도시 창가에서 어제의 지혜와 오늘의 삶을 엮어, 매일 조금씩 ‘작가’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요. 한 편의 글은 벽돌 한 장이고, 꾸준함은 그 벽돌을 잇는 단단한 모르타르입니다. 그렇게 지어진 집의 창가에 앉아, 저는 세상의 가장 진실한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