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실이 되어 감긴다. 서재 구석에서 나온 낡은 수첩은 내 기억의 실타래가 잠들어 있는 작은 광맥이었다. 표지가 해지고 모서리가 닳아 부드러워진 그 기록 속에는, 내 삶이라는 직물을 짤 수 있는 모든 원사가 묻혀 있었다.
손가락으로 더듬는 페이지마다 각기 다른 질감의 실이 만져졌다. 십 대의 미숙한 고백은 가늘고 푸른 명주실로, 이십 대의 야망과 좌절은 엉겨 붙은 잿빛의 실뭉치로 남아 있었다. 삼십 대에 갑작스러운 상실 앞에서 무너져내린 문장들은, 끊어진 채 흩어진 거친 삼베 조각 같았다. 그 모든 흔적은 지금의 나를 이룬 원사의 다채로운 결을 보여준다. 어떤 실은 성취의 광채로 윤이 나고, 또 어떤 올은 패배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바래 있었다. 처음에는 거칠고 끊어진 실의 매듭에만 시선이 머물렀다. 그러나 탐사를 멈추지 않자, 그 올들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실패라는 흙빛 실 위로 성숙이라는 초록의 실이 자라났고, 상실의 틈새 사이로는 새로운 빛깔의 실이 스며들고 있었다.
‘모든 지나온 길은 가치가 있다.’ 이 문장은 값싼 낙관이 아니라,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 어떤 무늬를 짤 것인지 결정하는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리는 단단한 선언이다. 우리는 흔히 삶의 매듭에 섣부른 딱지를 붙이지만, 어떤 경험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게 태어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정해진 도안 없이 세상에 던져져, 마주한 풍경 속에서 저마다의 색실을 얻고, 그것으로 스스로를 엮어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나온 나날은 그렇게 광활히 펼쳐진 직물과 같다. 우리는 그 위에 저마다의 올을 엮으며 무늬를 남긴다. 어떤 패턴은 거칠고 불균형하게 짜이고, 또 어떤 것은 섬세하고 정교하게 이어진다. 짧고 굵은 선, 엇갈린 결, 빛을 머금은 색채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단 하나의 직조물이 완성된다.
한 사람은 그가 겪어온 사건들의 단순한 총합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인간의 정체성은 흩어진 실의 조각들을 그저 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이어 하나의 의미 있는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서술자로서, 과거의 올들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며 하나의 일관된 맥락, 즉 ‘나’라는 서사를 엮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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