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이 방의 공기가 피부에 닿지 않고 나를 유리처럼 통과해 흘러간다고 느낀 것은. 오래도록 켜두어 미지근해진 공기 속에는 주인을 잃고 바래진 책갈피처럼 잊힌 페이지의 냄새와 시간의 먼지가 엉겨 있었다. 십 년 넘게 사용해 낡은 원목 탁자 위에 손을 얹었다.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수십 년의 세월이 남긴 미세한 흠집들이 손바닥 아래에서 해독 불가능한 고대 상형문자처럼 느껴졌다. 그 서늘하고 단단한 감촉만이, 안개처럼 부유하던 나를 지금 이 순간의 시공간에 못 박는 유일한 닻이었다.
천장의 낡은 형광등이 수명을 다해가는 파리처럼 미세한 고주파음을 내며 희미하게 깜빡였다. 그 빛의 단속(斷續)에 맞춰, 벽의 그림자가 내면의 불안처럼 길어졌다가 공포처럼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어디선가 냉장고 모터가 돌아가는 낮은 진동이 시작되었다. 전에는 인식조차 못 했던 그 모든 배경음이 오늘 밤, 저마다의 주파수로 울며 내 존재의 윤곽을 희미하게 지워내는 듯했다. 마치 조율을 포기한 오케스트라가 내는 불협화음의 한가운데, 나는 나 자신의 삶에서조차 추방된, 존재 자체가 소음이 되어버린 이방인이었다.
세상의 속도는 개인의 보폭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멈춤 버튼이 없는 무자비한 컨베이어 벨트와 같아서, 잠시 숨을 고르려 주저앉는 순간 저만치 밀려나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차가운 액정의 빛 속에서 쉼 없이 스쳐 가는 타인의 축제들. 손가락을 한 번 튕길 때마다 누군가는 지구 반대편의 눈부신 해변에서 완벽한 각도로 웃고 있었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이 박힌 명패 앞에서 미래를 약속받고 있었다. SNS 피드 위에서 모두가 전력 질주하는데 나만 발이 묶인 기분이었다. 그 완벽하게 연출된 행복의 파편들은 소리 없는 독촉장처럼 날아와 심장에 박힌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내 안의 공기를 얇게 베었다. 그 질문은 소리가 없기에 더 날카롭고 잔인했다. 뒤처지고 있다는 감정은 늪의 수면처럼 소리 없이 차올라 발목을 잡는다.
회의실을 채우는 유창한 언어들 속에서 나는 잠시 입을 뗐다가도 더 명료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에 묻히며 흐릿한 배경이 되고, 명절에 마주한 가족의 기대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장 다정한 중력으로 어깨를 짓누른다.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제 속도를 유지하지만, 내 존재의 주파수만이 홀로 어지럽게 떨렸다. 이 거대한 흐름 앞에서 나는 너무 작았다.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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