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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계절을 나만의 걸음으로

by 정성균

3장. 한가위 명상록 빛이 남긴 시작의 예감


시간이 잠시 멈추는 자리에서


내일이면 추석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유독 어떤 날들은 고유한 향기를 품고 다가온다. 가을 오후의 빛은 잘 익은 과일과 마른 짚의 냄새를 머금고 창 안으로 스며든다.


가을이 깊어가며 분주히 이어지던 걸음이 잠시 멈추는 저녁, 빛은 사선으로 길게 누워 벽 위에 자신만의 은근한 문장을 새긴다. 세상 모든 사물의 고유한 질감을 잠시 부드럽게 쓰다듬고 지나가는 그 빛의 손길. 이내 빛은 농도를 잃고 공기 속으로 희미하게 흩어지지만, 바로 그 찰나 방 안의 정적은 이전과 다른 결을 띤다. 공허한 침묵이 아니라, 성숙한 시간을 품은 응축된 머묾이다.


바깥세상의 소음은 얇은 유리창 너머로 아득해지고, 공간은 나를 위한, 그리고 곧 마주할 그리움을 위한 고요한 자리가 된다. 그 밀도 높은 정적 속에서 나는 곧 마주할 그리운 얼굴들을 하나씩 그려보다가, 이내 내 안의 가장 깊은 소리, 자신의 호흡이 남기는 기척을 듣는다. 빛의 퇴장은 소멸의 자리에 새로운 의미를 아로새긴다. 밖으로 향하던 의식을 거두어들인다. 분주했던 마음의 갈피를 단정히 꽂으며, 새로운 시간의 장을 맞이하라는 묵묵한 초대장을 받는다. 삶의 전환은 큰 소리로 찾아오지 않는다. 가장 익숙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감각의 미세한 균열 속에서 그 첫걸음을 내딛는다. 빛이 남기고 간 부드러운 어둠의 여백을 느낄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시작의 첫 실마리를 잡게 된다.


잊힌 다짐을 고쳐 묶는 순간


시간은 날카롭게 벼려낸 다짐마저 닳게 하는 끝없는 마찰과 같다. 반복되는 하루라는 습기 속에서, 한때 강철 같던 의지는 서서히 붉은 녹이 슬어 그 본질을 잃어간다. 한때 타오르던 열정은 관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중력에 굴복하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음의 시위는 힘없이 풀려버린다. 우리는 그 풀려버린 감각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정해진 궤도를 따라 무심히 걸어갈 뿐이다. 영혼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가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그러나 이제 곧, 삶의 호흡을 고를 시간이 온다. 내일로 다가온 한가위라는 시간이 고요히 접히는 넉넉한 자리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잊힌 다짐을 고쳐 묶는 행위는, 헐거워진 매듭을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춰 몸을 숙이는 겸허한 동작과 다르지 않다. 분주하게 뻗어 나가던 의식의 가지들이 ‘쉼’이라는 뿌리를 향해 되돌아오고, 그렇게 다시금 단단히 조여 맨 마음의 매듭은 지친 육신을 위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더 나아가 흔들리는 삶의 저울을 바로잡는 굳건한 중심점으로 자리할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응답이자, 미래를 향한 조용한 약속이다.


바로 그 순간, 삶은 ‘처음’으로 회귀하는 한적한 길목에 들어선다. 그 길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으되, 오직 머리 숙여 돌아보는 자에게만 자신의 모습을 허락한다. 우리의 일상은 곧 그 문턱을 지나, 한 해의 묵은 숨을 내뱉고 맑은 기운을 깊이 들이마시게 될 것이다. 공자 역시 ‘나는 날마다 세 번 내 몸을 살핀다(吾日三省吾身)’고 말했다. 명절은 바로 그 성찰을 위한 시간, 흩어진 다짐을 돼 묶는 깊은 사색의 자리가 된다.


철학이 말하는 시작의 조건


‘처음의 마음’은 덧없는 감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존재의 문양과 같다. 명절을 앞두고 분주함과 고요함이 교차하는 이 시간, 우리는 왜 이토록 ‘머묾’과 ‘새로움’을 갈망하는가.


혹시 당신의 오늘이 어제의 복사본처럼 느껴진 적은 없는가.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 관성의 사슬을 끊어내는 힘이 우리 안에 있음을 ‘탄생성(natality)’이라는 개념으로 밝혔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에 없던 새로운 시작이며, 그렇기에 삶의 모든 국면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운명처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사유는 다가올 명절을 앞둔 우리에게 묻는다. “이번 한가위라는 머묾의 시간을 통해, 당신은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가?”


우리는 종종 의미를 특별한 사건에서만 찾으려 한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보여주듯, 삶의 의미는 수동적으로 발견하기보다 능동적으로 부여하는 것에 가깝다. 이번 한가위에는 갓 쪄낸 송편의 온기, 온 가족의 웃음 속에서 나누는 햇과일의 단맛, 함께 바라볼 보름달의 온유한 빛을 그저 연례행사로 흘려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어머니의 손에 깊게 팬 주름과 조카의 눈가에 새로 생긴 작은 그림자까지도. 이 평범한 순간들에 ‘감사’와 ‘연결’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때, 그것들은 우리 삶의 밀도를 높이는 견고한 의식이 된다.


성취를 향해 달려오다 문득 허탈함에 잠기는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삶의 태도를 ‘소유(having)’와 ‘존재(being)’로 구분했다. ‘소유’를 위한 경주 속에서 우리는 지쳐왔다. 다가오는 한가위는 잠시 그 경주에서 벗어나 ‘존재’의 시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때다. 결과물인 풍성한 음식을 나누지만, 그 본질은 함께하는 시간과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존재’의 방식에 있다. 그의 물음은 우리를 근본으로 이끈다. “이번 명절, 당신이 붙잡아야 할 것은 소유의 결과인가, 존재의 과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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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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