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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장들, 나를 빚어가는 시간

by 정성균

가을의 초대


가을이 우리를 책으로 이끄는 것은, 그 고요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다.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 위로 바람이 스쳐갈 때, 그 광활한 여백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내면의 목소리와 마주 선다. 곡식이 곳간을 채우듯 인류의 정신은 활자 속에서 익어왔으니, 왕조의 명운을 걸고 써 내려가던 선비의 붓끝, 그 팽팽한 긴장감마저 이 계절의 풍경 안에 스며 있다.


가을은 인간을 고독의 본질과 대면시킨다. 릴케가 「가을날」에 남긴 예언처럼, “이제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일 것”이며, 깨어 읽고 쓰게 될 것이다. 여름의 소란이 잦아든 자리에 찾아온 침묵은 결핍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충실함이다. 하늘은 더 높이 열리고 공기는 맑아지며, 사물의 윤곽이 또렷해지는 그 순간, 시선은 자연스럽게 안쪽을 향한다. 짧아진 해가 드리운 긴 그림자는 깊은 숙고의 깊이를 더하고, 서늘한 공기는 부유하던 상념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저마다의 빛깔로 물들어가는 잎사귀는 우리 삶의 무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숨어 있던 자아의 흔적들은 제자리를 찾고, 고요 속에서 하나의 온전한 우주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의 체험은 타인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경이로움이며, 고립된 섬 같던 내가 세상과 이어지는 단단한 다리가 된다.


가을은 계절이 건네는 가장 지적인 초대장이다. 책을 펼치는 일은 지식을 더하는 행위에 머물지 않고, 존재를 다듬는 과정이 된다. 활자를 따라 흐르며 마음의 영토가 확장되고, 깊은 숙고는 자기 안의 단단한 핵을 새겨간다. 이 계절에 읽는다는 것은 습관을 이어가는 일이면서 동시에 삶이라는 책의 다음 장을 써 내려가는 여정이 된다.


마음의 보폭


삶이란 예측할 수 없는 굴곡으로 이루어진 길이다. 평탄해 보이던 길 위에 갑자기 절벽이 나타나고, 익숙하던 풍경은 낯선 갈림길로 이어진다. 길의 모양을 바꿀 수는 없으나, 그 위를 걷는 나의 보폭과 시선, 자세만큼은 온전히 내 의지에 달려 있다. 독서란 변화무쌍한 길 위에서 균형을 잡고 한 걸음의 의미를 되새기는 영혼의 보법(步法)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시절, 나는 카뮈의 『페스트』를 읽었다.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연대하던 인물들의 모습은, 혼돈의 한가운데 선 나에게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희미한 등불이 되었다. 책은 이렇게 상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나를 붙들어 주었다. 또 어떤 가을, 창밖으로 스며드는 귀뚜라미 소리에 잠 못 이루던 밤에는 소로우의 『월든』을 펼쳤다. 불필요한 욕망과 복잡한 관계로 마음이 소란하던 때였다. 그의 기록을 따라가다, 나는 한 문장 앞에서 숨을 멈추었다.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 to front only the essential facts of life.”

“나는 의도적으로 살고자 숲으로 갔다. 삶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대면하고 싶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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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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