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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서 나를 되찾는 법

- 무너짐의 한가운데서 발견하는 인간의 가장 큰 동력 -

by 정성균

폭풍은 언제나 예고 없이 다가온다


차창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컸다. 귀를 짓누르는 굉음이었다. 주변의 규칙적인 질서가 일순간 파열되는 감각. 와이퍼가 필사적으로 빗물을 밀어냈지만, 거대한 회색 물이 시야를 한순간에 덮어버렸다. 나는 한적한 국도 한가운데서 투명한 상자에 갇힌 사람처럼 고립되었다. 바로 그때, 나의 예측 가능한 삶의 궤도가 완전히 이탈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덜컹거리던 엔진은 마른기침 몇 번을 하더니 이내 먹먹하고 무거운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시계를 보여주던 계기판의 불빛마저 깜박이다 영원히 꺼져버렸다. 듣던 라디오 노랫소리가 허공으로 사라지자, 그 정적은 소리보다 훨씬 날카로운 무언가가 되어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시동 버튼을 여러 번 눌러보았다. 스마트키는 반응이 없었다. 기계는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거대한 쇠붙이 덩어리일 뿐이었다. 손바닥에 끈적한 땀이 배었고, 온몸을 차가운 무언가가 감쌌다.


나는 무심코 검지 손가락을 들어 습기 찬 운전석 창문에 댔다. 문명과의 소통이 끊긴 순간, 존재의 경계를 원초적인 방식으로 확인하려는 본능이 작동한다. 스마트 기기의 액정이 아닌, 차가운 유리 위에 희미한 자국 하나를 남겼다. 그것은 '나'라는 섬이 세상에 던지는 연약 하면서도 집요한 신호였다.


전화기를 확인했다. 신호는 잡혔지만, 배터리가 경고음과 함께 방전되어 차가운 유리판이 되었다. 배터리가 꺼지며 마지막 디지털 끈도 함께 끊어졌다. 철제 공간에 작은 생명처럼 웅크렸다. 우리가 쌓아 올린 견고한 생활이 얼마나 허술한 토대 위에 있었는지. 삶의 단절은 이토록 준비 없이, 그리고 무자비하게 우리를 찾아왔다. 어제와 같을 거라 믿었던 길 위에서 모든 것이 숨을 고르듯 멎었다. 발밑의 땅이 꺼져 내리는 감각. 그 낭떠러지에서 인간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진다.


처음엔 멈출 수 없었다


위기가 닥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상황을 ‘내 능력으로는 안 되는 상태’라고 정의해 버리고, 잃어버린 질서를 어떻게든 다시 세우려 격렬하게 몸을 움직인다. 나는 시동을 다시 걸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브레이크를 밟은 채 시동 버튼을 무작정 거듭 눌러 시스템에 명령을 주입하려 했다. 혹은 꺼진 전화기를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쏟아지는 빗속으로 나가 젖은 엔진과 부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런 행동은 겉으로는 상황을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망적인 감각을 외면하려는, 복잡하고 정교한 회피 행위였을 뿐이다.


오래전부터 현명한 이들은 가르쳤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라고. 자동차 고장, 통신 단절,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 변화 같은 것은 명백히 내 의지 밖에 놓인 일들이다. 이 외부 영역을 내 능력으로 억지로 통제하려 들 때마다 좌절감은 더 깊어질 뿐이다. 젖은 엔진이 묵묵히 침묵하고, 전화기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나의 노력이 외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미미하다는 것을. 이 무력한 몸부림이 완전히 멈춰 선 순간. 그제야 나를 지탱하는 동력이 어디서 오는지 찾을 수 있었다.


고요한 눈으로 마음의 중심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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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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