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년 이후의 자기 회복 기술서 -
의식은 수면의 장막 위로 가장 먼저 떠오른다. 창밖은 아직 푸른 밤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고, 공기 중에는 밤의 밀도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를 깨우는 것은 강한 의지력이 아니다. 매일 같은 시각에 쌓인 몸의 기억, 그 축적된 습관이 나를 일으킨다. 관절 마디마다 남아있는 밤의 잔여물을 어루만지듯, 느릿하게 몸을 움직여본다. 청년기에는 생각이 행동보다 성급하게 앞섰지만, 이제는 둔감해진 감각을 몸의 리듬이 흔들어 일깨운다. 몸이 정신보다 먼저 하루를 개시하는 이 순간, 삶의 무게중심은 조용히 자리를 옮긴다. 노년의 삶을 다스린다는 건, 한동안 밀려나 있던 몸의 고유한 박동을 다시 맞추는 일일지 모른다.
미루는 습관을 뒤로하고, 이윽고 묵직한 필기도구를 집는다. 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단단한 감촉이 마음을 끈다. 액정 화면의 미끄러움과는 확연히 대비된다. 질감이 느껴지는 종이의 저항감을 경험하며 첫 획을 긋는다. 비어있는 종이 위에 비로소 하나의 서술을 배치한다.
문자를 적어 나가는 손의 움직임은 안개와 같던 생각을 밖으로 꺼내 만지게 하는 구체적인 작업이다. 손 근육이 작동하고, 그 신호가 뇌에 전달되는 동안 곰곰한 생각의 갈피가 잡히기 시작한다. 동시에 불규칙하던 신경계가 안정감을 얻으니, 이것이야말로 손으로 쓰는 활동이 주는 귀한 선물이다. 손으로 무언가를 적는 행위는 몸으로 생각을 돕는 일이며, 가장 솔직한 신체 활동이다. 펜촉의 느린 움직임은 기록의 범위를 넓혀, 흩어진 생각을 한자리에 모으는 행위가 된다.
기록에 호흡을 얹는 순간, 두 행위는 하나의 흐름이 된다. 글쓰기를 잠시 멈추고, 깊게 호흡을 들이마신다. 폐가 팽창하고 잠시 숨을 멈출 때, 빠르게 뛰던 심장 맥동이 느려지고 어깨에 뭉쳤던 긴장감이 풀리는 것을 감지한다. 호흡 조율은 숨결로, 글쓰기는 언어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동이다. 존스 홉킨스 의대의 한 연구(Goyal M et al., JAMA Internal Medicine, 2014)는 매일 10분의 조용한 순간이 우울감과 불안을 완화하고 면역 반응을 안정화한다고 보고했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려는 의도와 관계없이, 그저 이 아침의 고요함, 짧은 숨의 이완 속에서 몸과 정신은 동시적으로 평형을 되찾는다. 소리 없이 무너지는 일상을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해준다.
무언가를 적어 내려갈 때, 치솟던 감정의 파도가 차분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 신호는 이성적 숙고가 끓어오르던 정서를 다독이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뇌의 전전두피질(충동 조절 영역)이 충동을 제어하고 상황 판단을 담당한다. 격렬한 흥분이 가라앉으면 몸을 긴장시키던 스트레스 호르몬(코르티솔)의 분비 또한 낮아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기록은 뇌에게 스스로를 관찰할 여유를 부여하는 활동이다. 펜을 잡은 손이 종이를 가로지르는 속도를 조절하는 동안, 우리는 그 속도와 맥동까지 통제하게 된다.
잠시 필기도구를 내려놓고 눈을 감아본다. 호흡에 주의 모으기를 하면, 복잡하게 얽혔던 뇌파는 알파·세타 대역이 안정된 '깨어있음과 이완'의 상태가 된다. UCLA 명상연구센터(2016)는 이러한 상태가 신체의 회복력을 증진시킨다고 설명한다. 육체는 가장 깊은 휴식 단계에 진입하지만, 의식은 명료하다. '이완된 몰입'을 경험하는 것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지 않은 채, 과녁을 향해 숨을 고르는 상황과 유사하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경험이 잦아질수록 혈압이나 맥박의 변동 폭이 줄어들고 숙면을 취하게 된다. 곰곰한 생각이 감정의 빠르기를 따라잡을 때, 몸의 움직임도 한결 느려진다. 정신의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신체의 재활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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