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의 시간과 인간의 기록에 관한 단상 -
싼값에 산 얇은 노트를 펼쳤다. 필기구를 들고 종이 위를 응시하며, 머릿속 과거의 자취를 더듬어 찾아 나섰다. 이 노트는 특별한 의미 없이 다이소 매대에서 집어 온 물건이었으나, 이제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조용한 매개가 되었다. 샤프펜의 가는 심이 만들어낸 서술의 흔적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종이 끝에 묻어나는 희미한 잉크 향은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는 낡은 배와 같았다. 한 시기의 고독한 투쟁이 남긴 활자들은, 과거의 어느 날 복잡하게 얽혔던 감정을 붙잡아 보려 했던 증거였다. 이전에는 숱한 대화 속에서 풀려나오던 마음의 매듭이 이제는 필기구를 타고 흘러나왔다. 세월이 깊어질수록, 말은 줄고 글이 자랐다. 말이 지배하던 시절을 지나, 어휘를 신중하게 고르는 순간이 삶의 중심이 되었다. 과거의 나를 읽는 작업은, 현재의 내가 지난날과 맺는 새로운 계약과 같다.
젊은 날에는 음성 발화가 모든 것을 주도했다. 목소리는 뜨거운 맥박처럼, 마음의 열이 가장 먼저 흘러나오는 통로였다. 벗과 밤새 나누던 대화는 새벽의 찬 공기를 잊게 할 만큼 격렬했고, 순간의 열정으로 터져 나온 감탄사들은 관계의 밀도를 곧장 높였다. 나는 소리를 통해 자신을 드러냈고, 세상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당시의 소통 방식은 속도전이었다. 말이 오가는 속도가 곧 관계의 온도였다. 목소리의 전달은 즉시 사라지는 휘발성을 지녔지만, 그 빠른 소멸이 마음을 가볍게 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 앞에서 스스로를 공연했다. 나는 목소리의 크기로 관계 속에서 내 자리를 확보하려 했고, 빠른 응답으로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러나 연륜이 쌓이면서 말의 수명이 얼마나 짧은 지를 깨달았다. 아무리 힘주어 외쳤던 다짐이나, 감동으로 고백했던 이야기들도 몇 주가 지나면 공기 중으로 사라지며 기억의 층 아래로 가라앉았다. 특히, 오해를 풀겠다고 급히 쏟아낸 수백 마디가 오히려 관계를 더 복잡하게 꼬았던 시점들을 기억한다. 음성의 홍수 속에서 정작 전해야 했던 진심은 방향을 잃고 표류했다. 나는 소통의 피로를 겪은 뒤, 샤프심이 종이를 긁는 낮은 소리만큼 조용한 방식으로만 스스로에게 응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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