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이 생각을 증명하는 시기 -
인간의 매일은 수많은 미완의 문장들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른다. 머리에는 이미 화려한 문장이 다듬어져 있지만, 현실로 나아가 실천의 종이 위에 적히는 것은 고작 몇 개의 단어에 불과한 경우가 아주 흔하다. 가장 평온하고 정적인 시기, 손끝이 멈춘 책상 위 메모에는 ‘할 일’ 대신 ‘해야만 하는 나’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나는 왜 이 머릿속 그림을 실재 세상으로 옮기지 못하는가’에 대한 아주 깊은 물음이다. 실행 의무와 힘없음 사이에 놓인 좁고 깊은 간극, 우리는 이것을 주저함이나 미루는 버릇이라 일컫는다. 언어와 동작 사이의 이 틈새는 우리의 실체가 관념 속 그림에 머무는 존재인지, 아니면 땅을 딛고 선 실체인지를 가르는 경계가 된다.
어떤 것을 결정하기 직전의 머뭇거림은 일종의 ‘감정적 정지 상태(Emotional Stasis)’에 가깝다. 심리가 그린 구상은 눈 깜빡할 사이에 완성되지만, 이 느릿한 육신은 여전히 납득할 만한 까닭을 기다리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머리는 빛의 속도로 내달리고, 몸은 돌덩이처럼 굳게 제자리에 박혀 있는 시기다. 우리는 이 멈춤 속에서 쓸데없는 게으름이나 무력함을 탓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이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심리가 수많은 논리를 조립하고 해체하는 동안에도, 육신은 그 아이디어가 현실에서 치러야 할 무게와 매듭을 저울질하며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해야 한다’는 명령이 ‘할 수 있다’는 역량으로 변하지 못하는 이 답답한 주기는, 우리의 실행이 감정적 자극과 논리적 설득 사이를 오가는 진자 운동의 과정이다.
미루는 버릇은 완벽주의의 덫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사고로 설계한 계획은 오차가 없는 이상적 형태를 갖추지만, 현실의 실천은 오류와 부족함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완벽한 이상을 불완전한 현실로 끌어내려 실패를 확정 짓는 행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의 작용을 펼쳐낸다. 실행을 향한 주저함은 나태함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가 세운 이상향을 지키려는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사고만 무성하고 실행이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순간은, 이상적인 관념의 무거움이 움직이려는 신체 에너지를 압도하는 인지적 부담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실현은 이성의 냉철한 판단보다는, 때로 의식 아주 깊은 곳에서 튀어나오는 원초적인 반응일 때가 많다. 육신은 이미 움직이려 하는데, 머리는 아직도 ‘왜 움직여야 하는지’를 설명하느라 분주한 상태다. 이 무의식의 자극은 가장 강력한 실천의 동력이며, 스스로에게 보내는 가장 솔직한 신호이기도 하다. 운명이 작동한 그날의 선택은 아무런 준비 없이, 그저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발현된다. 오랫동안 머뭇거리던 프로젝트에 대한 전자우편을 보내는 시점, 혹은 용기가 필요한 대화에서 망설임 없이 말을 꺼내는 시점은 철저한 분석의 귀결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 깊은 곳의 가치관이 솟아난 작은 분출과 흡사하다.
이처럼 내적 언어가 육신의 언어로 옮겨가는 주기, 우리의 실재는 추상적인 개념의 세계를 벗어나 단단한 현실과 비로소 마주한다. 깊은 숙고의 결과가 현실에 닿아 완성되는 지점은, 그것이 ‘몸으로 스며드는’ 순간임을 우리는 파악하게 된다. 머리가 방향을 가리킬 뿐, 육체만이 그 방향을 향해 실제로 한 걸음 나아가는 실재의 증명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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