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 가지 배움의 문장을 따라가는 감성 철학 기록 -
오래된 필름처럼 삶의 장면들이 흐를 때, 문득 깨닫는다.
책에서 읽고 머리로 외웠던 수많은 말들이 현실의 궤적에서는 쉽게 무너졌던 경험이 있다. 예를 들어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구호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세상의 변수가 모든 결과를 흩트릴 때 금세 무력해진다. 성공한 이들이 건넨 '이렇게 살라'는 명쾌한 말들은, 현실의 예측 불가능한 무게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이다. 혈기왕성하던 때, 나는 지혜를 지식처럼 모으면 모든 어려움을 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인생은 학교에서처럼 정답을 내어주지 않는다.
시간의 깊이가 더해지고, 고열의 고난의 시기를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그 무게가 와닿는 이야기들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이 이야기들은 누군가의 조언 목록에서 뽑아낸 단어들이 아니다. 그 말들은 고통과 기쁨, 반복된 시행착오를 겪으며 몸에 새겨진 흉터와 같은 기억의 언어일 뿐이다. 이 언어는 겪어낸 사람만이 해독할 수 있는 흔적을 담고 있다. 작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세월은 날들이 결코 알지 못하는 많은 것을 가르친다"라고 말했다. ¹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일상은 가장 평범한 교실이다. 이 교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거두어 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때 들었던 그 이야기가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이 깨달음은 뇌로 하는 이해가 아니다. 그것은 생존의 지혜이며, 그 물결은 우리에게 성숙의 무게를 남긴다. 세월은 숨겨진 진실을 감추지 않는다. 그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본다.
이 기록은 삶이 내게 건넨 열 가지 배움의 문장들을 정리한 것이다. 손에 쥐려 했으나 놓아야 했던 것들, 피하려 했으나 끝내 마주해야 했던 아픔을 통해 인생이 조용히 속삭여준 언어들이다. 이 열 개의 문장을 따라가며, 삶의 깊은 곳에 남겨진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그 문장들은 내 안의 시간들이 남긴 흔적이었다.
아무리 단단히 쥔다 해도 손가락 마디마디를 비집고 빠져나가는 마른 모래의 미세한 저항을 느낀다.
젊은 날은 모든 것을 붙잡으려 애쓰는 집착의 시절이다. 직함을 놓지 않으려 하고, 시시각각 주식창을 확인하며 통제권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한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통제한다는 감각이 곧 나의 존재 가치라고 착각했다. 굳게 쥔 주먹이 긴장을 만들고, 그 긴장은 곧 불안으로 번진다. 쥔 손 안에는 새로운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시간이 흐르자, 붙잡으려 했던 것들은 힘없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관계, 굳건했던 젊음의 기운 모두 세월의 강물에 실려 떠내려가는 경험을 한다. 그때마다 나는 상실의 고통에 무릎 꿇었다. 왜 나는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었는지 절망하기도 했다.
수많은 잃음을 경험하고 나서야, 나는 시간의 긴 물결의 진정한 역할을 깨닫게 된다. 시간의 물결은 거칠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나고 보면 그 흐름이 우리 하루에 정돈된 질서를 세운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쥐고 있던 것이 필요했던 것인지, 사회적 시선 때문에 들고 있던 짐이었는지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대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은 욕망을 다스리는 태도에 있었다.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하려던 오만을 내려놓자, 하루가 비로소 숨을 쉰다. 빈자리를 마련하면 새 기회가 먼저 다가오는 법이다. 질서는 쥐어짜는 힘으로 서지 않는다. 흘려보내는 유연함에서 자란다. 이제 나는 내려놓음을 통해 내 하루의 방향을 스스로 정한다.
손에 들었던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던 순간,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우리는 언제나 성공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법만 배워왔다. 실패는 반드시 피해야 할 낙인이라고 배웠다. 청춘의 시기 나는 이 실패를 피해 달아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오랜 심혈을 쏟아부은 사업 제안이 최종 심사에서 무산되었을 때,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나의 부족함이 가장 명확하게 증명되었다고 느꼈다. 이 수치심이 바로 나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낯선 타인의 시선이 내 피부를 조각내고, 나는 잠시 호흡을 잃는 듯한 감각에 빠지곤 했다.
성공의 경험들은 늘 외형적인 포장에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좋은 평가와 화려한 성과는 나의 자긍심을 높여주었지만, 내 존재의 뿌리를 깊게 만들지는 못했다. 반면 작은 비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고 부서지는 허술한 자아를 감추는 덧칠로 남았다.
진정한 힘은 실패가 남긴 무너진 자리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법이다. 실패는 우리를 가장 낮은 곳으로 인도하여, 더 이상 변명할 수 없는 맨몸의 상태로 직면하게 한다. 그때서야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세상이 칭송하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 무너짐을 견디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깊은 힘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견고한 초석이 되는 것이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그는 "인간은 고통으로 인해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의미 없는 고통으로 파괴된다"라고 말했다. ²
실패는 가장 가혹하지만 가장 솔직한 가르침을 준다. 성공에 취해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나의 약점, 근본적인 실수를 여과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아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기술을 배우게 된다. 고통의 흔적이 남긴 자국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그 자국은 두꺼운 굳은살이 되어 삶의 지혜로 변모하는 법이다.
만약 넘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히 나를 과신하는 오만에 빠졌을 것이다. 일어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채, 작은 시련에도 영원히 주저앉았을 것이다. 실패의 체험은 우리의 삶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토대일 뿐이다.
타인의 시선이 반사된 거울 앞에서, 나의 표정이 낯설게 포착되던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발견한다. 사람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배우는 존재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움직임과 감정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에, 관계의 균형을 잡는 일은 평생의 과제다. 끊임없이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는 동료, 혹은 사소한 일에 감정을 폭발시키는 가족을 볼 때 '왜 저 사람은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 하는 의문은 관계의 가장 흔한 충돌 지점이었다.
나는 나를 알아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세월이 지나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이해가 시작되는 시점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마음은 비로소 확장된다. '저 사람은 나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은 내 마음속에 세워놓았던 좁은 잣대를 부수었다.
타인은 거울과 같다.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짜증, 기쁨, 평화의 표정을 통해, 우리는 결국 내 마음의 상태를 들여다본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이 거울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를 짜증 나게 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로 이끌 수 있다"라고 말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다른 사람의 모습은, 사실 내가 인정하기 싫었던 내 안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타인의 작은 허영에 내가 과도하게 분노할 때, 그 분노는 내가 감추고 싶은 욕망을 대신 보고 반응하는 것일 수 있다.
관계는 언어의 표면 위에서 교환되지 않는다. 오히려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변함없는 기세의 축적으로 그 깊이를 확보하는 것이다. 마음의 깊이는 화려한 고백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말이 멈춘 자리에서도 묵묵히 기둥을 세우는 그 지속성이 관계의 심도를 보여주는 셈이다. 관계가 난해하게 느껴질 때마다, 타인의 시선이 나의 미처 몰랐던 세계를 새롭게 관찰할 기회를 열어준다. 그 거울 앞에서, 나는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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