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책상 앞에서 다시 시작하는 생존의 우아함
흰머리가 늘어나는 일을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손에 쥐고 있던 능력들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팽팽했던 피부는 느슨해지고, 또렷했던 기억은 흐려지며, 직장에서 나를 증명하던 명함조차 사라진다. 세상은 이를 두고 상실의 과정이라 부른다. 그러나 중년의 능선을 지나 노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나는 전혀 다른 풍경을 목격한다.
며칠 전 회의 시간이었다. 새로 교체된 회의실 장비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띄우지 못해 쩔쩔매는 내게, 한참 어린 후배가 다가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요즘 누가 선을 꽂아서 연결해요? 그냥 무선으로 띄우면 되는데."
악의 없이 건넨 그 말이, 내 시간이 낡아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서늘한 신호가 되었다. 젊은 날을 바쳐 쌓아 온 경험이 그 짧은 말 한마디에 고철 취급을 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입김을 뱉어내고 나서야, 욱하고 치솟던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살다 보니 알게 된다. 줄어드는 것은 힘의 총량이 아니다. 힘을 쓰는 방향이 달라질 뿐이다. 젊은 시절 우리는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달렸다. 의미 없는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불필요한 경쟁에 에너지를 쏟았다. 반면 세월이 흐른다는 건, 그 무거운 짐들 중에서 내게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가려내는 안목을 갖게 됨을 뜻한다.
늙음은 기능의 붕괴보다 선택의 정교화라고 봐야 한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젊음의 열기가 식은 자리에, 비로소 고요한 통찰이 들어선다. 이것은 퇴보와 구별된다. 삶의 밀도가 높아지는 현상이다. 복잡한 곁가지를 쳐내고 단단한 줄기만 남기는 고목(古木)처럼, 인간은 늙어가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가장 정직한 얼굴과 마주한다. 그렇기에 우아하게 늙는다는 말은 비싼 옷을 두르거나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겉모습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남은 에너지를 배움에 집중하려는 겸허한 태도를 일컫는다. 몸은 예전 같지 않을지라도, 배우려는 정신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다. 오늘 밤, 나는 그 정신을 지키기 위해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서재의 스탠드 조명을 켠다. 노란 불빛이 가만히 내려앉으며 어둠을 밀어낸다. 그 빛의 둘레 안으로, 낮 동안 처리해야 했던 업무 서류들과는 성격이 판이한 종이 묶음이 오롯이 드러난다. 이 좁은 공간 위에 쌓인 책들은 제각기 다른 높이로 울퉁불퉁하게 탑을 이루고 있다. 은퇴 이후의 자산을 다룬 경제 서적, 세대 차이를 좁히기 위한 대화법 책, 인공지능 시대의 생존 전략을 담은 기술서가 빼곡히 섞여 있다. 이 책들은 재미를 위해 설렁설렁 펼쳐둔 게 아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밀려나지 않고 사람 구실을 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숙제들이다.
표지에 내려앉은 먼지를 검지 끝으로 가볍게 쓸어 본다. 손끝에 닿는 책상 표면의 감촉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던, 패기만만했던 시절의 기억을 끌어올린다. 그때 내 자리에는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명함 한 통과, 선배의 어깨너머로 배운 내용을 빈틈없이 적은 업무 수첩이 놓여 있었다. 다이어리 맨 앞장에는 ‘최고가 되자’는 투박한 다짐이 적혀 있었고, 야근을 밥 먹듯 해도 피곤한 줄 몰랐던 열기가 감돌았다. 과거의 책상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한 도약대였다. 사다리는 견고했고, 위만 보고 기어오르면 그만이었다.
'그때는 답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문제가 뭔지도 모르겠군.'
입안에서 쓴웃음과 함께 혼잣말이 맴돈다. 지금 마주한 이 책상은 과거와 성격이 다르다. 산업 구조가 빠르게 뒤집히는 사회에서 위험한 것은 숫자로 된 나이가 아니다. 더 이상 궁금한 게 없다고 믿는 시점이야말로 진짜 위기다. 배우기를 멈추면 지난날의 경험은 지혜가 되지 못하고, 그저 고집스러운 옛날이야기로 남게 된다.
젊은 날을 바쳐 갈고닦은 기술은 어느새 낡은 유물이 되어간다. 새로운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을 대신한다는 뉴스는 내 책상 위로 날아든 예고장처럼 다가온다. 은퇴 후의 자금 흐름을 점검하는 내 손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숫자로 묶어두려는 의지로 움직인다. 글쓰기를 배우며 문장을 다듬는 시간은 엉킨 생각을 가지런히 하는 치유의 과정이 된다. 펜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