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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다 알기엔, 아직 이르다

시간이 증명하는 것들에 대하여

by 정성균


[시작하는 글]


"난 원래 성격이 이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건 나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었다. 복잡한 상황을 설명하기 귀찮아서, 혹은 나의 밑바닥을 들키기 싫어서 댄 가장 안전한 핑계였다.


우리는 쉼 없이 타인을 향해 화살을 쏘아댄다. 타인을 정의하고, 분류하고, 마침내 판단 내리는 일에 중독되어 있다. 하지만 남들에게 던진 그 뾰족한 말들이, 돌고 돌아 결국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타인을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이분법으로 딱 잘라 판단하는 습관은, 정작 나 자신에게 가장 무서운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남들에게 들이대던 그 엄격한 잣대가, 어느새 나를 향해 "너도 한번 미끄러지면 그걸로 끝장이야"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으니까.


이 글은 나의 솔직하고 부끄러운 고백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글을 읽는다고 해서, 혹은 내가 이 글을 마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훌륭한 인격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아마 내일도 무심코 누군가를 제멋대로 판단하고 오해할지 모른다.


하지만 딱 하나 바라는 건 있다. 누군가를 쉽게 재단하려는 순간, "아, 내가 또 이러네?" 하고 아주 잠깐 멈칫하는 것. 그 짧은 망설임이 나를 괴물이 되지 않게 붙잡아주길 바랄 뿐이다.


무엇을 씹고 있는가


주말 저녁의 고깃집은 거대한 전쟁터 같았다. 테이블마다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가 실내를 자욱하게 메웠고, 요란하게 부딪치는 술잔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 같은 웃음소리가 뒤섞여 귀가 먹먹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둘러앉아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삼겹살 기름이 튀어 손등이 따끔했다. 고기가 다 익어갈 무렵,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이 자리에 없는 K에게로 옮겨갔다.


"들었어? 이 사람, 이번에도 회사 그만뒀다더라. 소문이 영 안 좋더라고요."


누군가가 가위로 고기를 자르며 말했다. 싹둑.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그 소리는 그 어떤 판결보다 단호하고 차가웠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처음 볼 때부터 끈기가 없어 보이더니."


맞장구가 이어졌다. 초록색 병들이 비워질수록 목소리에는 확신이 실렸다. 우리는 기름진 고기를 씹으며,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아주 쉽게 씹고 있었다. 누군가의 실패담은 술자리에서 가장 소비하기 좋은, 값싸고 자극적인 안주였다.


나는 말없이 탄산음료가 담긴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검은 액체 위로 기포가 타닥타닥 터지며 올라오고 있었다. 알코올이라곤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목 넘김이 묘하게 쓰렸다. 식도 어딘가가 꽉 막힌 듯 답답했다.


하지만 나는 침묵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안도했다. K가 '구제 불능'이라는 칸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상대적으로 '아직은 괜찮은 사람', '평범하게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칸에 머물 수 있었으니까. 타인을 깎아내려 얻는 그 저열한 우월감이 좋아, 나는 맨 정신의 비겁함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를 난도질하며 비로소 끈끈한 하나가 되었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톡 쏘는 그 단물을 들이켰는데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 배는 불렀지만, 속이 느글거렸다. 뱃속에 기름기가 낀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찌꺼기가 낀 것 같았다.


불편한 밥상


단단해 보이던 내 편견에 금이 간 건, 예고 없이 찾아온 나의 위기 때문이었다. 야심 차게 맡았던 프로젝트가 엎어지면서 돈도 잃고, 사람들의 신뢰도 잃었다.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고깃집에서 함께 K를 흉보던 이들은 연락을 피하거나, 위로를 가장한 훈수를 두고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었다. 내가 남들을 평가하던 그 잣대 그대로, 나 역시 '실패한 인간'으로 분류당하고 있었다.


그때 내게 먼저 손을 내민 건 놀랍게도 K였다. 그는 긴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캐묻지도, 섣불리 충고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놓치고 있던 실무적인 처리 방법 두어 가지를 문자로 보내주고는, 밥이나 한 끼 먹자고 했다.


만난 자리에서도 그는 담백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식당 아주머니의 무거운 쟁반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고, 밥을 다 먹은 뒤엔 묵묵히 식탁에 흘린 물을 닦았다.


그 사소한 행동 하나가 나를 몹시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나는 고마움보다 수치심을 먼저 느꼈다. 하필이면 내가 그토록 무시했던 사람, '끈기 없는 패배자'로 규정해 두었던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했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내가 사람을 그토록 납작하게 보았다는 사실이 더 부끄러웠다.


나는 그 밥자리에서 끝내 "미안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밥만 꾸역꾸역 삼켰다. 나의 편견은 상대에 대한 무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나의 오만에서 온 것이었다.


편집된 기억


시선을 타인에게서 나에게로 돌려본다. 나에게는 지우고 싶은 시절이 없는가. 기억의 서랍을 열면, 먼지 쌓인 비디오테이프처럼 다시는 틀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수두룩하다.


이십 대 후반, 나는 잘난 척이 심했다. 내가 이룬 작은 성공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고, 남의 상처에는 무덤덤했다. 내 이득을 위해 동료의 공을 교묘하게 가로챈 적도 있었고, 연인에게 씻을 수 없는 모멸감을 주며 헤어지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왜 그랬을까.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이 눈을 가렸다고 변명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사정일 뿐이다.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그저 비겁한 가해자였다. 만약 누군가 내 인생을 그때의 한 장면에서 '일시 정지' 시키고,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영원히 '이기적인 배신자'나 '오만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과거가 누군가를 벌주는 '증거'가 되려면 전체적인 맥락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상은 맥락을 지루해하고 결론만 보고 싶어 한다. "그 사람, 옛날에 그랬대." 이 한 문장은 앞뒤 사정을 싹둑 잘라낸 채 한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몬다. 나 역시 K에게, 그리고 수많은 타인에게 그랬듯이.


놀이터의 노인


시간은 뚝 끊어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인다. 사람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개과천선하여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다. 다만 흐르는 물속의 조약돌처럼, 매일 조금씩 깎이고 닳아서 마침내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진 존재가 될 뿐이다.


몇 년 뒤, 우연히 옛 직장 상사의 소식을 접했다. 현직에 있을 때 그는 '면도날'로 불렸다. 부하 직원의 보고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던 사람. 효율이 곧 선(善)이었고, 느린 것은 죄악이라 믿었던 그를 나는 진심으로 증오했다. 그는 절대 부러지지 않을 쇠몽둥이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히 마주친 그의 모습은 내 기억과 완전히 달랐다. 도심의 한적한 공원 놀이터였다. 그는 벤치에 엉거주춤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손주가 있었다.


아이는 흙장난하느라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흙을 파고, 다시 덮고, 또다시 파는 그 지루하고 의미 없는 반복. 예전 같았더라면 당장 아이의 손목을 잡거나 호통을 쳤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있었다. 초조해하는 기색도, 재촉하는 눈빛도 없었다. 한때 부하 직원의 30초짜리 변명도 참지 못하던 사람이, 아이의 느릿하고 하염없는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그의 등은 작아졌고, 흰머리는 듬성듬성했다.


나는 그 놀이터 귀퉁이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가 변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내 마음속의 미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이 시간 속에서 변할 수 있다는 감동적인 진실 앞에서도, 나는 여전히 옹졸한 피해자로 남고 싶어 했다. 그는 변했지만,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과거를 붙들고 있었다.


[닫는 글]


글을 맺으며 고백한다. 사실 이 모든 이야기는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나의 실패담이다.


우리는 타인을 다 알지 못한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 다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캄캄한 밤바다를 건너는 중이고, 그 여행의 끝에 어떤 모습으로 닿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수 하나, 실패 한 번으로 당신이라는 사람 전체를 납작하게 구겨버리기엔, 당신이 살아낼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지금 당장 결론 내리지 않아도 된다. 당신을, 그리고 타인을 규정하기엔 아직 이르다.


입가에 하얀 입김이 피어오른다. 공중에서 흩어진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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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상담가로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며 소중한 순간들을 글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며, 이를 통해 깊이 있는 사유와 글로 표현하며 교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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