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사슬의 반경, 태엽처럼 돌아간 어느 겨울

by 정성균

쇠사슬이 긋고 간 첫 번째 선


 오른쪽 새끼손가락 끝에는 비스듬하게 융기된 선 하나가 박혀 있다. 열일곱 겨울방학, 살을 에던 노동의 흔적이다. 또래 아이들이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기 위해 학원으로 향하거나 눈 덮인 거리를 몰려다닐 때, 기름진 소음과 칼바람이 들이치는 인근 제조 시설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그 시절 간절히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일제 카세트 녹음기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언어의 문장들을 갈무리하고, 서툰 발음을 저장해 다시 들으며 고치기 위한 장비였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외산 음향기기를 사달라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결국 손수 번 돈으로 그 정교한 물건을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 무거운 엔진음과 차가운 금속 냄새가 가득한 작업장 안에서 입에 붙지 않는 단어들을 입속으로 굴리며, 이 한기를 벗어난 세계로 나아갈 언어를 모으고 있었다.


 방학 동안 이어진 현장 생활은 유난히 시리고 고됐다. 설비 돌아가는 진동은 바닥을 타고 올라와 발끝을 마비시켰고, 창틈으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은 작업복 안을 파고들었다. 거대한 동력 장치의 리듬 사이에서 기기의 가격과 영어 단어의 무게를 저울질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오후의 짧은 해가 저물 무렵, 잠시 몸을 녹이려 건물 뒤편, 잡초가 얼어붙은 창고 구석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갑작스러운 정적 속에서 쇠사슬이 거친 시멘트 바닥을 긁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르륵, 츠르르. 무거운 금속이 지면을 훑는 그 불길한 마찰음이 고막을 파고든 건 찰나였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쇠사슬이 낡은 화장실 알루미늄 새시(Sash) 후려치는 날카로운 굉음이 터져 나왔다. 챙그랑, 하고 알루미늄 틀이 요동치는 것과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오른손을 집어삼켰다. 큰 개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새끼손가락의 관절을 깊숙이 파고들며 뼈가 어긋나는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다. 비명보다 먼저 터져 나온 것은 뜨거운 혈액이었고, 놈의 아가리 속에서 짓이겨진 살점의 감각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얀 김이 되어 흩어졌다. 새시가 울리는 그 짧은 반경 내에서, 신체의 일부가 처참하게 물어뜯긴 순간이었다.


 피가 솟구치는 손을 움켜쥐고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 공장 반장은 안부보다 현장에 떨어뜨리고 온 공구의 행방을 먼저 물었다.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그 차가운 공간에서 찢어진 살점의 통증보다, 손을 바라보지 않는 그 시선의 냉기를 먼저 읽었다. 낯선 언어를 배우려던 소년은 그날, 세상의 언어가 얼마나 차가울 수 있는지를 먼저 배웠다. 낙인처럼 남은 흔적은 여전히 그날의 금속음과 똑같은 각도로 굽어 있다.


느슨한 거리의 기만


 사회에서 만난 관계들도 저마다의 줄을 매고 있었다. 다만 그 줄은 공장의 그것처럼 녹슬어 있지도, 요란한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어떤 것은 비단결처럼 부드러워 눈에 띄지 않았고, 어떤 것은 지나치게 길어 마치 상대가 완전히 자유로운 영혼인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넉넉해 보이는 길이를 안전으로 오해했다. 타인의 친절과 미소라는 긴 줄 끝에, 언제든 낚아챌 수 있는 힘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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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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