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무릎으로 읽는 날씨

by 정성균


[헌사] 미래를 담보로 오늘을 유예하던 도서관의 묵직한 책상들과, 그 딱딱한 의자 위에서 기어이 겨울을 나던 이름 모를 청춘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열쇠가 열지 못한 문


인생에서 명확하게 마침표를 찍은 일보다 중단된 감각이 우리를 더 오래 지배한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떼어내며 책상을 정리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낡은 열쇠 꾸러미를 발견했다. 이미 처분한 옛집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맡겨두고 찾아가지 않은 마음의 조각인지 알 길 없는 쇳덩어리였다. 쓰레기통 위로 손을 가져갔으나 멈칫했다.


손가락 끝에 닿은 쇳조각의 서늘하고 날카로운 감촉이 과거의 한 귀퉁이를 건드렸다. 열쇠는 묵직한 무게로 손바닥을 눌렀다. 그것은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보낸 시간들이었다. 문을 열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보낸 그 적막한 공기가 쇳조각에 박혀 있었다. 매끄러운 바닥 위로 쇠붙이가 구르는 소리가 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기에, 해가 바뀌어도 마음은 늘 그 문 앞에 몇 발짝 뒤처져 있게 된다.


그 미련은 액정 화면 속에서 깜빡이는 커서로 이어진다. 스마트폰 속에 저장된 글들은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날것의 진심이 고여 있는 자리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깎고 다듬은 언어가 아니라, 주인을 찾지 못한 문장들이 그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연말의 소란스러운 모임에서 돌아와 홀로 거실의 불을 끈다. 액정에서 새어 나온 서늘한 빛이 어두운 방 안을 채울 때,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의 번호를 화면에 띄우고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 더 추운 것 같아요"라고 적어본다.


창틀을 흔드는 겨울바람 소리가 정적을 깨고, 깜빡이는 커서는 대답을 기다리는 심장박동처럼 느껴진다.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손가락의 머뭇거림은 비겁함이 아니다. 그 문장을 내보내는 순간 정말로 그 사람과 작별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지독한 애착이다. 저장함 속의 문장들은 마르지 않는 서랍 습기처럼 일상을 눅눅하게 만든다. 그 눅눅함에 기대어 마음은 바스러지지 않고 하루를 더 버텨낸다.


2인분의 정적과 무늬들


떠난 자리에 남는 것은 그리움만이 아니다. 이제는 아득한 추억 속에 고인 시간들이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도서관의 묵직하고 너른 책상을 마주하고 앉던 시절이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빛나던 옆얼굴이 유난히 고왔던 사람. 가끔씩 눈이 마주칠 때면 말 없는 약속처럼 서로의 빈 잔을 채워주던 그 온기 때문에 만들어진 구차한 버릇들이 가슴 한복판에 무늬처럼 선명하게 남는다. 몸은 마음보다 느리게 배운다. 도서관 폐관 안내 방송이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가방 두 개를 챙기려 손을 뻗다가 멈칫한다. 비어 있는 옆자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돌아오는 손바닥의 허전함은 예상보다 무겁다.


요즘도 가끔 배달 앱을 켜면 어느덧 '2인분' 버튼 앞에서 손가락이 머뭇거린다.


"내일은 오빠가 좋아하는 거 먹자. 우리 시험 합격하면 근사한 곳에 가고."


도서관 휴게실에서 작은 보온밥통을 사이에 두고 그녀가 건네던 약속이 스마트폰 화면 위로 환영처럼 겹쳐진다. 그녀의 집을 몇 번 방문하여 그곳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으나, 정작 그녀는 내 집 문턱을 한 번도 넘은 적이 없다. 흔적이 전혀 닿지 않은 방 안에서, 여전히 누군가의 자리를 비워둔 채 모퉁이를 돌아 걷는다.


의미 없는 일과로 하루를 채우는 행위는 이미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의 무늬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비어 있는 공간을 새로운 행동들로 천천히 덮어쓰는 지루한 작업 속에서, 비로소 부재라는 이름의 실체를 만진다.


창백한 종이가 긁고 지나간 지문


이러한 기억은 눈보다 손끝으로 느낀 촉감을 통해 되살아난다. 피부가 기억하는 질감과 압력은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본능의 영역이다. 서재 책상 위에 놓인 거친 종이의 질감을 문득 만질 때면, 수십 년 전 외풍이 들이치던 단칸방에서 쥐고 있던 연필의 감각이 살아난다. 그때의 손은 가난을 증명하듯 늘 연필심의 흑연 가루로 얼룩져 있었고, 손날에는 가시지 않는 거뭇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날카로운 종이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긁고 지나갈 때, 정적 속에서는 펜촉이 메마른 종이 위를 앓는 듯 긁어대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기억이란 머리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집요한 흔적이다. 사진은 색이 바래고 기억은 왜곡되지만, 한 번 각인된 촉각은 예고 없이 나를 과거의 한복판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날의 지독했던 문장들은 나를 묶어두는 족쇄였으나, 지금의 나에게는 살아내야 했던 시간에 대한 가장 단단한 훈장이다. 특별한 사건보다 반복된 하루가 마음을 더 견고하게 만든다. 인생의 줄기는 매일 물을 주고 흙을 다지는 시간의 층위에서 굵어진다.


식탁 모서리에 닿는 무릎의 익숙한 통증은 예보보다 정직하게 지나온 시간을 증언한다. 비가 오려는지 뼈마디 사이로 서늘한 기운이 먼저 스며든다. 이 욱신거림은 수만 번의 평범한 아침들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생의 기록이다.


기상청의 수치보다 몸이 먼저 알아채는 오늘의 날씨가 하루의 채비를 더 확실하게 결정한다. 낡은 엔진이 예열을 기다리듯, 나는 삐걱거리는 관절을 달래며 비로소 하루를 시작한다.


몸이 기억하는 계절은 틀리는 법이 없다. 그것은 이 땅을 딛고 버텨온 세월만큼 축적된 나만의 데이터다. 이제는 누구도 주의를 주지 않는 통증을 스스로 보살피며, 나는 내 몸이 보내는 가장 고독하고도 정직한 신호에 귀를 기울인다.


나중에라는 목소리


지키지 못한 말들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않고 마음의 밑바닥에 침전물처럼 가라앉는다. 여유로워진 일상만큼이나 빼곡해진 일정들 사이로, 도저히 지워낼 수 없는 아주 오래 전의 대화 하나가 기억의 심연으로부터 호출된다. 홀로 차를 몰아 한적한 외곽 도로를 달린다. 앞 유리에 부딪히는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지며 과거의 정경을 훑고 지나간다.


“나중에, 우리 형편이 좀 나아지면 그때 하자.”


그 시절 도서관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주고받았던 그 말은, 현재의 모든 욕망을 유예시키던 우리만의 애틋한 약속이었다.


형편이 나아진 지금에야 비로소 그 목소리가 와이퍼가 지나간 자리처럼 창에 남는다. 약속을 지킬 여유는 비로소 가졌으나, 정작 그 말을 나누던 주인공은 곁에 없다는 사실이 차가운 유리에 남은 숨결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종이를 오래 접어두면 선이 사라지지 않듯, 지키지 못한 약속도 그렇게 마음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다.


밤의 정적 속에서 서재의 책장들이 습기를 머금고 몸을 뒤트는 소리를 낸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가구들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며 내는 낮은 신음은 고립감을 더 깊게 판다. 낮에는 별것 아니라고 치부했던 타인의 말들이 가시가 되어 찌르기도 하지만, 이 사색의 시간을 통과하며 마음은 조금 더 질겨진 가죽을 얻는다. 현관으로 나가 무심코 구두 주걱을 쥐는 매일의 무감한 동작들 사이로, 정제되지 않은 고통은 여전히 가구 틈의 먼지처럼 내려앉는다.


겨울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탄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압력이 차갑다. 허벅지는 단단히 부풀고 숨이 거칠어진다. 멈추면 그대로 고꾸라질 것 같아 다시 한번 페달을 누른다.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균형이 조금씩 돌아온다. 언덕 끝에서야 비로소 숨이 풀린다. 견디는 법을 배우며 그렇게 나아간다.


지문 사이로 남은 냉기


이제 깨끗이 비워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삶은 연결된 흐름이다. 서재 책상 위에 쌓인 먼지와 아직 다 읽지 못한 책 몇 권은 내가 여전히 탐구해야 할 세계가 남아 있음을 말해준다. 덜어내지 못한 미련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묵직한 기억의 봇짐을 지고 뚜벅뚜벅 걷는 뒷모습을 본다.


거실 창에 비친 손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지문 사이로 흐르는 냉기는,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그 낡은 열쇠의 서늘함과 꼭 닮아 있다. 열지 못한 문 앞에서 서성이던 시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손끝에 단단한 감각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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