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문장

소란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가장 느린 기록의 시간

by 정성균

1장 느림을 선택하는 이유


빠르다 눈부시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훑는 속도는 빛보다 앞선다 화면을 올리면 이야기가 쏟아지고 반응은 이미 저만치 달려 나간다 누군가 낱말을 끝내기도 전에 해석이 붙고 사건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결론이 내려진다 세상은 자꾸만 즉각적인 대답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 흐름에 발을 맞추지 못하면 뒤처질 것 같다는 초조함을 안고 산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 물결에서 몸을 뺀다 모두가 치달을 때 홀로 멈춰 서는 일은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글 쓰는 이에게 더딤은 게으름이 아니라 대상이 스스로 속내를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예의다 벌어진 상황을 성급하게 재단하지 않고 한 발치 물러나 바라본다 지금 당장 이 일이 내게 어떤 가치인지 정의 내리려 애쓰지 않는다 판단을 유보하고 그저 응시하는 세월 그 고요한 멈춤의 순간이 비로소 문학의 뿌리가 된다


뿌리 깊지 않은 나무는 바람에 휘둘리고 서둘러 지은 구절은 읽는 이의 가슴에 닿기도 전에 흩어진다 나는 재촉하여 쓴 기록보다 오래 묵혀 두었다가 꺼낸 글월이 지닌 힘을 믿는다 민첩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창작자는 가장 느린 이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풍경을 발견하고 소란함 속에 숨겨진 참모습을 길어 올릴 수 있다


잠들기 전 방안의 불을 끄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른 번의 숨을 가만히 세어 보아도 됩니다


2장 자기 검열이라는 장벽


초고를 쓰기 위해 하얀 화면을 마주할 때마다 두려움이 찾아온다 이 기록이 타인에게 가닿을까 지난번보다 못한 결실을 맺으면 어쩌지 하는 염려가 손가락을 굳게 만든다 외부의 시선보다 무서운 것은 내 안의 엄격한 감시자다 타인과 견주며 스스로를 낮추는 목소리는 가혹한 심판이 되어 돌아온다


나는 비난 대신 조율을 택한다 모니터 속 커서가 나를 다그칠 때 시선을 돌려 낡은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모래가 떨어지는 15분 동안은 형편없는 글을 쓸 권리를 나에게 허락한다 오타와 비문조차 문장이라는 이름으로 환대한다 문장이 막힐 때면 책상 위 빈 유리컵을 응시한다 컵 속의 투명한 공간이 내 안의 여백이라 믿으며 억지로 채우려 하기보다 그대로 두는 연습을 한다


모래가 모두 가라앉으면 컵을 쥔 손에서 힘을 뺀다 비어 있음으로써 무엇이든 담을 수 있게 된 유리컵처럼 내 안의 검열관도 경계를 풀고 물러난다 고치고 다듬는 과정이 있기에 시작은 완전할 필요가 없다 나를 아끼는 마음이 읽는 이를 토닥이는 매듭을 만든다


내일 아침 당신이 쓴 첫 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지우지 말고 그대로 두어도 괜찮습니다


3장 디지털 소음과 흩어진 마음


알림 소리가 울린다 소식이 쏟아진다 서술의 흐름은 가차 없이 끊긴다 겨우 문장 하나를 붙잡는다 싶으면 어느새 다른 공상이 끼어든다 정신을 모으는 일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치열하게 지켜내는 것이다 나는 산만한 시절을 살아가기 위해 마음을 단련한다 달아난 상념을 매번 인내심을 갖고 제자리로 데려온다


집필을 시작하기 전 나는 정성껏 연필을 깎는다 사각거리며 나무껍질이 벗겨지는 소리와 은은한 향은 흩어진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신호가 된다 뾰족해진 연필 끝을 바라보며 단 한 줄에 깊이 잠길 준비를 마친다 소란함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기개 그것이 사유의 근육을 만드는 첫걸음이다


휴대폰을 다른 방에 두고 십 분 동안만 창밖의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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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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