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은 언어로 남는다

부제: 나이가 들수록 글쓰기와 말하기가 뇌를 지키는 이유

by 정성균

낯선 기계 앞에서의 퇴장, 사라지는 존재의 권리


얼마 전,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지인에게 서글픈 고백을 들었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는데, 카페의 키오스크 화면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결국 커피 한 잔 주문하지 못하고 소변만 보고 돌아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화면 속 글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등 뒤를 찌르는 것 같아 도망치듯 나왔다"는 그의 말에는 기계에 서툰 한 어른의 하소연을 뚫고, 자신의 언어가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느끼는 실존적 무력감이 배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를 데리고 다시 그 기계 앞에 섰습니다. "이 단어는 이런 뜻이고, 이 버튼은 우리가 평소 말하는 '주문할게요'와 같은 거예요." 지인의 손을 잡고 화면 속 언어들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주었을 때, 비로소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습니다.


이 장면은 키오스크 사용법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평생을 지탱해 온 자신의 언어 체계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문법 앞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깊어가는 존재들이 마주한 서글픈 단면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집의 기초가 약해지는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젊은 날의 패기는 사라지고 거울 속에는 주름만이 남지만,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가장 핵심적인 근육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언어의 근육'입니다. 늙어가는 자의 존엄은 근육의 탄력이 아니라, 자신이 뱉은 언어의 명료함에서 완성됩니다.


'기여'라는 단어를 잃어버렸던 어느 오후의 풍경


뇌과학에는 인지예비력(Cognitive Reserv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평생 복잡한 언어활동을 지속한 사람은 뇌세포가 줄어든 자리를 쌓아온 신경 연결망이 대신한다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이 우아한 학술 용어가 저의 현실로 다가왔을 때, 그것은 경이로움보다는 당혹감에 가까웠습니다.


글을 쓰던 중 평소 수천 번은 썼을 법한 '기여'라는 단어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는 의미가 가득 차 있었지만, 정작 그 이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텅 빈 모니터 앞에서 저는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노화라는 파도가 내 기억의 해안선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한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뇌의 지도를 다시 훑기 시작했습니다. '공헌', '도움' 등 비슷한 의미의 낱말들을 연결하며 끊어진 신경망의 다리를 다시 놓으려 애썼습니다. 십여 분의 사투 끝에 마침내 단어를 찾아냈을 때, 길 잃은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열쇠를 찾은 듯한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단어 하나가 사라질 때 그 사람의 세계도 함께 무너집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만 중장년이 키오스크 앞에서, 혹은 회의실에서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 고단한 단어 찾기는 제가 정신적으로 살아있다는 정직한 증거이자, 무너지는 세계를 지탱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하버드가 80년간 추적한 '2배'의 격차


언어는 고립된 섬이 아닙니다. 관계를 통해 흐르며 우리 뇌를 보호하는 강력한 방어막이 됩니다. 1938년부터 80년 넘게 724명의 삶을 추적한 하버드 연구에 따르면, 80세 이후 인지 기능을 결정짓는 핵심은 경제력이 아니라 '사회적 연결의 질'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이들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이들에 비해 인지 처리 속도의 감퇴 속도가 무려 2배 이상 빠르게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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