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멈춘 자리

by 정성균

부제: 흐름이 끊긴 뒤에야 드러나는 실제에 대하여

어떤 대상이 움직임을 멈출 때 실제 모습이 드러납니다. 빠른 속도에 가려져 있던 내면의 풍경은 모든 흐름이 끊긴 자리에서 선명한 윤곽을 얻습니다. 이 지점은 무작정 참는 행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겉치레를 지워내며 남겨진 핵심이 무엇인지 살필 뿐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재설계하며 제 시간의 주인이 되어가는 대목들을 기록합니다.



냉점(冷點)


뜨겁게 내닫던 심상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눅진한 무게감이 남는다. 간절함의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안도감이 아닌, 뼛속까지 스미는 적막이다. 내면의 시계는 기계적인 등속으로 흐르지 않는다. 신뢰가 가장 깊었을 때 도리어 속도가 꺾이며, 그늘진 구역이 생겨난다. 이때 피부에 닿는 서늘한 기운은 내가 품었던 열망의 부피를 증명하는 정직한 눈금이다.


쏟은 만큼 거둘 것이라는 산술적 가설은 힘을 잃는다. 보상은 지연되고, 인내는 어떤 평안도 약속하지 않는다. 인과율이 깨진 자리에서 삶의 생경한 얼굴이 드러난다. 어제까지의 방책들은 낡은 지도가 되어 바스러지고, 눈앞의 고요만이 실측 가능한 현실로 남는다. 에너지가 밖으로 분출되지 못하고 안으로 고일 때, 생각은 수직의 심연을 향해 낙하한다.


닫힌 방


공기가 응축된 듯한 고립은 주변의 소음을 휘발시킨다. 아침마다 마주하는 것은 어제와 같은 위치에 박힌 발자국뿐이다. 쏟아부은 힘은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흡수된다. 아무리 두드려도 진동조차 없는 문 앞에 홀로 선 기분은 아득함 그 자체다. 통증보다는 가슴을 짓누르는 먹먹함이 앞선다. 타인의 소식은 화려한 활자가 되어 허공을 떠도는데, 이곳에는 단 한마디의 음성도 고이지 않는다.


이 공간에서 초침은 야속할 만큼 정밀하게 움직이지만, 일상은 정지 화면 속에 박제된다. 외부 세계와 연결된 끈이 느슨해질수록 내부를 향한 중력은 오히려 강해진다. 말을 잃어버린 방 안에서 비로소 자신과의 치밀한 대질이 시작된다. 사회적 역할이라는 껍질이 벗겨진 뒤, 거울 속에 남겨진 낯선 존재를 온전하게 응시하는 지점이다. 고독은 존재를 보호하는 격벽으로 작동한다. 외곽의 소란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여,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떨림까지 기록하게 만드는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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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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