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통 무언가를 그만두지 못할 때 삶이 흔들린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고, 조금만 더 버텼어야 했다고 해석하는 쪽을 택한다. 멈추는 선택은 쉽게 포기로 오해되고, 계속하는 태도는 대개 미덕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 결과 이미 감당의 범위를 벗어난 뒤에도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일상을 이어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선택이 어디까지 괜찮은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질문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지나침의 경계는 삶을 유지하는 판단의 중심에서 작동하는 규율이다. 누구도 그것을 따로 배우지 않았고, 명확하게 설명받은 적도 없지만, 거의 모든 일상은 그 영향 아래 놓여 있다. 이 규율은 규칙의 형태로 제시되지 않는다. 대신 습관과 기대, 암묵적인 기준 속에 스며든 채 선택의 방향을 조용히 틀어놓는다. 작동 여부를 자각하지 못한 채 하루를 통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족함에 대한 두려움은 쉽게 고개를 든다. 능력이 모자라서, 애씀의 양이 충분하지 않아서, 간절함의 농도가 옅어서 일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석하게 된다. 이런 판단은 대체로 빠르고 단순하다. 실패의 원인을 결핍으로 환원하는 방식이 다시 움직일 명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채우려 한다. 더 오랜 시간을 버티고, 더 많은 고통을 견디며, 더 깊이 자신을 마모시킨다. 이 과정에서 질문은 사라지고, 투입만 남는다.
삶이 무너지는 장면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전혀 다른 흐름이 드러난다. 사람을 흔들고 균열로 이끄는 계기는 결핍보다는 지나친 투입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부족함은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하지만, 과잉은 방향 감각을 흐리게 만든다. 멈추지 못하는 국면에서는 선택의 폭도 함께 줄어든다. 이 글은 미덕처럼 보이는 과도한 태도가 일상의 균형을 어떻게 흔드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판단력이 어떤 방식으로 약화되고 다시 회복되는지를 따라간다. 그 회복의 기준을 ‘삶의 유지선’이라 부르고자 한다.
지나침은 대체로 선한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성실, 배려, 헌신이라는 명칭은 그것을 의심하기 어렵게 만든다. 사회가 승인한 가치들은 질문보다 동의를 먼저 요구한다. 옳다고 받아들여지는 순간, 경계는 자연스럽게 흐릿해진다. 미덕은 방향을 밝혀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동시에 멈춤을 가리는 장막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늦은 밤까지 업무를 붙잡고 있는 태도는 열정으로 불린다. 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미루는 행동은 성숙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런 자세들이 언제까지 일상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해지지 않는다. 사회는 늘 더 하라는 신호를 반복하고, 중단해야 할 시점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그 침묵은 개인에게 책임의 형태로 전가된다.
멈춰야 할 시점을 판단할 명확한 신호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를 점검할 기준은 늘 뒤로 밀리고, 이미 넘어선 뒤에야 상태를 돌아보게 된다. 신체가 먼저 신호를 보내고, 내면이 먼저 닳아버린 뒤에야 비로소 너무 멀리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지나침은 자각보다 항상 한 걸음 앞서 발생한다. 그 결과, 삶의 경계는 눈에 보이는 선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노력은 삶을 움직이게 만드는 중요한 힘이다. 다만 모든 에너지는 방향과 균형을 함께 요구한다. 일정한 지점을 지나면 투입의 양은 사고의 질과 점점 멀어진다. 생각은 서서히 굳어지고, 시야는 점점 협소해진다. 이런 현상은 의지의 강약보다는 몰입의 과잉이 사고의 여지를 잠식하는 구조에서 비롯된다.
정신이 과부하 상태에 놓이면 긴급 상황에 대응하듯 사고하게 된다. 문제를 붙잡고 있다는 감각은 강해지지만, 선택의 범위는 조금씩 줄어든다. 사유는 깊어지기보다 되풀이된다. 이때의 시간은 생산보다는 자기 확신을 유지하기 위한 소모에 가깝다.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판단을 대신하는 순간, 방향은 이미 흐트러져 있다.
글이 써지지 않아 오랜 시간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하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집중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쌓일수록 그 자리는 사고의 공간에서 고립의 장소로 변한다. 오래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집중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산책 중이거나, 물을 마시러 일어났다가,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찰나에 문제의 실마리가 떠오르는 경험은 흔하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계속 밀어붙이고 있었던 것은 문제를 향한 집중이 아니라, 멈추지 못한다는 두려움이었음을. 자신의 한계를 무시한 애씀은 외부의 요구에 사고의 주도권을 넘기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감정은 삶을 해석하는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다만 정서가 판단의 자리를 오래 차지하기 시작하면 현실은 점차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특정한 기분이 지속될수록 세계는 그 기분이 입힌 색채를 통해 인식된다. 그 색은 선명해 보이지만, 실제 구조를 가리기도 한다.
과도한 낙관은 위험을 가볍게 여기게 만들고, 장기간 이어진 불안은 모든 가능성을 위협으로 읽게 만든다. 이런 국면에서는 복잡한 상황이 하나의 상태로 단순화된다. “나는 화가 났다”라는 말은 현재의 마음을 설명하는 표현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자신을 그 상태의 범위 안에 묶어 두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감정은 설명이 되는 동시에, 스스로를 가두는 언어가 된다.
감정은 날씨와 닮아 있다. 머물렀다가 지나간다. 날씨가 흐려졌다고 해서 하늘의 구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상태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면 자극에 즉각 반응하는 생활의 리듬에 갇히게 된다. 마음의 평온은 성취 이후에 따라오는 보상이라기보다 사고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조건에 가깝다.
관계에서의 지나침은 특히 조용하게 진행된다. 배려와 양보가 반복되면 그것은 점차 서로 간의 기준으로 굳어진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호의는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부담을 남기고, 그 부담은 시간이 지나며 기대와 서운함의 형태로 바뀐다. 침묵 속에서 쌓인 감정은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
기대는 표현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참아온 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차곡차곡 쌓여 사이의 균열을 만든다. 함께하던 시간이 끝에 이르는 이유는 대개 큰 사건보다 오랜 시간 누적된 탈진에 가깝다. 자신을 깎아내며 유지해 온 연결은 결국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마모시킨다. 거절하지 못한 배려는 선의에서 출발했더라도 자기 소진으로 이어지기 쉽다. 사이는 각자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인식할 때 비로소 오래 유지된다.
삶의 방향을 다시 조정하기 위해 필요한 기준은 지속 가능성이다. 지금의 방식이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단기간에 모든 힘을 쏟아붓는 선택은 미래의 여지를 줄인다. 오늘의 과도한 투입은 내일의 에너지를 앞당겨 사용하는 진행으로 이어진다. 이 흐름은 즉각적인 성과를 남길 수는 있어도, 장기적인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절제는 억지로 참는 태도라기보다 에너지를 나누어 사용하는 방법에 가깝다. 매일 잠깐씩 걷는 습관이 무리한 계획보다 오래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급함은 지나침을 불러오고, 과잉은 결국 멈춤을 요청한다. 삶을 오래 이어 가는 힘은 속도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아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 감각이 바로 삶의 유지선을 가늠하는 잣대다.
지나침의 경계를 인식하는 일은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감당 가능한 크기를 알고 그 안에서 선택하겠다는 결심은 삶의 주권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가장 단단한 장면은 화려한 순간보다, 흔들림 속에서도 구조를 유지하는 시간에 가깝다.
경계를 지키는 선택은 삶을 위축시키기보다 일상이 계속될 수 있는 바탕을 다진다. 자신의 한계를 존중할 때 시간의 흐름은 다시 안정된 결을 되찾는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멈추는 선택은 포기가 아니라 조정에 가깝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로 익혀야 할 감각은 더 잘 견디는 기술보다, 언제 멈출 수 있는지를 아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삶은 늘 더 멀리 가는 사람보다, 무너지지 않고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의 시간 위에 오래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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