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된 말버릇

by 정성균


강단 옆에 서면 손등부터 힘이 빠진다. 따뜻하던 숨이 아래로 가라앉고 얇은 기운이 피부에 스민다. 연습한 문구들을 머릿속에 하나둘 정리하고 화면 속에 띄운 자료를 살피지만, 첫마디를 뱉기 직전 오래된 목소리 하나가 발설되지 못한 채 명치끝에 걸린다.


“왜 이렇게 느려.”


소리는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만 그 음절은 근육의 긴장과 거친 호흡으로 몸에 남는다. 십수 년 전 그 한마디가 귓속을 때리는 순간, 어깨는 굳고 손끝까지 흐르던 피가 멎는 느낌이 든다. 몸은 위축된 자세를 기억한다. 그 무게는 등을 타고 내려와 고비마다 숨을 짧게 만든다. 나는 그 소리가 아직도 어딘가에 붙어 있음을 안다. 생각보다 먼저, 살갗이 알아보는 떨림이다.


어릴 적 박힌 평가는 오래간다. 내게 ‘느리다’는 평은 설명이 아니라 벽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몸을 밀어내는 장벽이었다. 손가락 마디가 굳는 순간, 나는 다시 그 벽 앞에 선다. 피부에 남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자리를 옮겨가며 오래 남는다.


이 반응은 변덕이 아니다. 살과 힘줄 사이에 눌린 흔적이다. 연단 위에 설 때마다 발끝에서 시작해 올라오는 이 요동은, 오래전 그 소리가 아직 내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는 신호다. 한마디는 사람의 자리를 밀어내고, 걷는 방향까지 바꾼다.


씌워진 이름표의 무게


그 말은 처음 들어간 일터에서 들었다. 모든 것이 낯설던 시절이었다. 나는 업무에 익숙해지기 위해 누구보다 오래 남았다. 초안 하나를 쓰더라도 낱말을 고르고 앞뒤 흐름을 수십 번씩 살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실수하지 않겠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빠름보다 정확함을 붙들고 있던 때였다.


건조한 형광등 아래 자판 소리가 쉼 없이 울렸다. 나는 그 안에서 나만의 박자를 찾으려 애썼지만, 주변의 속도는 늘 앞서 나갔다. 책상 위에 쌓인 종이들은 내가 견뎌야 할 시간처럼 느껴졌다. 쉼표 하나, 조사 하나를 바꿀 때마다 손바닥에 맺힌 땀을 닦았다.


밤을 새워 다듬은 서류를 내밀던 날이었다.


“일은 빨라야 해. 이렇게 굼떠서 어떻게 버티겠어.”


그는 조용히 말했지만, 내 안에서 팽팽히 버티던 무엇인가가 끊어졌다. 숨이 멎었다. 손끝의 감각이 둔해졌다. 창밖에는 여름빛이 번지고 있었지만 그 열은 내 자리까지 오지 못했다. 반팔 아래로 소름이 돋았다. 몸은 그 짧은 구절 안에 갇혀 있었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회색 카펫의 표면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고, 발등 위에 떨어진 그림자가 유난히 짙게 보였다. 방금 청각을 치고 간 그 음성이 뇌 속에서 몇 번이고 재생되었다. 호흡을 죽이고 그 진동을 하나씩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윗사람의 눈빛은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그가 남긴 표현은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누군가가 붙인 꼬리표가 나를 대신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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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책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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