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문을 나서는 시점, 이제 학습이라는 짐을 좀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곤 한다. 정해진 교과 과정을 마치고 학사모를 던져 올리는 행위는, 지긋지긋한 시험이나 과제로부터 벗어났다는 달콤한 안도감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해방감의 뒤편에는 이내 묘한 공허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졸업장이라는 얇은 종이 한 장을 삶의 모든 난관을 해결해 줄 완전한 지도로 착각했음을 깨닫는 그때, 사람들은 다시금 막막한 길 위에 서게 된다. 세월의 굽이를 돌아 무수한 계절의 퇴적을 몸으로 겪으며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사실이 있다. 생(生)이라는 넓은 교실에는 종소리도, 방학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침표를 찍어줄 수료식 또한 기다리고 있지 않다. 손에 쥔 증서가 실상은 새로운 입학을 알리는 아주 짧은 안내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비로소 온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지식의 습득은 지표면 아래에서 묵묵히 흐르는 수맥과 같다. 멈추지 않고 그 물을 길어 올리는 한, 탐구는 마른 일상을 적시는 동력이 된다. 지식의 전당인 도서관의 묵직한 정적 속에서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서가 사이를 메운 오래된 종이 냄새를 맡으며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는, 마음속 깊은 곳의 지적인 갈증을 차분히 채워주는 과정이다. 그것은 오늘이라는 새로운 수업에 참여하기 위한 의식이며, 굳어가는 사고의 관성을 깨뜨리는 정갈한 저항이다. 한 권의 저서를 펼치는 일은 낯선 세계의 문고리를 돌리는 긴장된 행위인 동시에, 어제까지의 자신을 부정하고 다시 태어나겠다는 고결한 선언이기도 하다. 멈췄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던 그날 아침, 낡은 가방을 챙기며 느꼈던 그 생경한 공기의 압박이 배움의 진짜 시작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매일 찾는 자유학습실은 치열한 생의 현장이다. 형광등 아래 길게 늘어선 책상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채 침묵의 대화를 나눈다. 그곳에는 한때 조직의 중심에서 세상을 움직였을 이들이 퇴직이라는 쉼표를 찍고 다시 독서대 앞에 앉아 있다. 돋보기안경 너머로 지침서를 응시하며 새로운 자격증을 얻기 위해 필기구를 쥔 손에 힘을 주는 모습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사각거리며 종이를 긁는 연필 소리가 규칙적인 호흡처럼 공간을 채운다. 그들이 꾹꾹 눌러 적는 활자들은 정보를 수집하는 단계를 지나, 다시 사회와 연결되고자 하는 절박한 신호에 닿는다. 흰머리가 희끗한 중년들이 젊은 수험생들 사이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속도로 지혜를 흡수하는 광경은, 학문에 있어 나이라는 장벽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증명한다.
디지털 학습실의 풍경 또한 다르지 않다. 노트북을 켜놓고 인터넷 강의에 집중하는 뒷모습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낮은 웅성거림조차 허용되지 않는 이곳에서 마우스 클릭 소리 하나에도 조심스러움이 묻어나지만, 화면 속 강사의 설명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눈빛은 청년의 그것보다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창틈으로 스며든 늦은 오후의 햇살이 어깨 위에 머물며 흘러가는 시간을 기록한다. 온라인이라는 낯선 바다에 돛을 올리고 지혜의 항해를 이어가는 이들의 분투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공부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 공간은 정지된 장소이기보다, 다시 한번 세상이라는 무대로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벼리는 뜨거운 연마의 장이다. 누군가는 종이 위에서 생소한 전문 용어가 빼곡한 수험서를 넘기고, 누군가는 푸른 모니터 속에서 프로그래밍 언어를 탐독한다.
도구와 방식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 치열한 몸짓들이 향하는 종착지는 결국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배움의 끝은 결국 하나다. 여전히 살아있으며, 쓸모 있는 존재라는 뜨거운 증명.
그 서늘하고도 간절한 삶의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인간은 매일 다시 책상을 마주한다.
대한민국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나이 들어가고 있다.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이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공원을 가득 메운 백발의 행렬이 더는 낯선 풍경이 아닌 일상이 되었고, 그 두터운 숫자 뒤에는 저마다의 생존법을 고민하는 눈동자들이 들어차 있다. 이제 환갑은 축하받을 장수가 되기보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의 반환점을 도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백 세 시대를 눈앞에 둔 시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국가의 복지나 경제적 자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장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잃지 않는 일이다. 성장은 어린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생의 후반부에 마주하는 진보는 더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는 작업에 가깝다.
과거에는 퇴직 이후의 삶을 정리 단계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의 노년은 새로운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제2의 입학 시기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수년간 문장과 씨름하며 지내온 시간만큼이나, 중년의 시기를 지나며 새로이 달게 된 에세이스트라는 명찰의 무게는 각별하다. 앞으로 남은 수십 년의 세월을 그저 지나간 과거를 추억하며 보낼 것인지, 인생 학교의 심화 과정으로 채울 것인지는 오로지 개별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 학습은 이제 선택의 영역을 통과하여 품격 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략이 되었다. 그것은 쇠락해 가는 육체에 지적 탄력을 부여하는 유일한 방부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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