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독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by 스칼렛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으며, 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달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의 숲)’를 샀을 때가 2004년이었다. 한국에서 번역이 처음 나온 때는 1989년 6월이다. 그때는 내가 고등학생이었고, 그런 소설이 있는지도 몰랐다. 2001년에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키우면서 심심했는지 하루키의 소설을 샀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때는 정말 이런 소설류가 안 읽혔다. 30대인 내가 이런 사랑이야기에 빠질 만큼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정서적으로도 감성적이지 않았다. 요즘말로 대문자 T라고 하면 바로 이해가능하다. 그때는 현실이 더 절실했고 급했다. 아이를 키워야 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때였다. 책장이 넘겨지지 않는 반감이 있었다. 그때는 앞으로 미래에 대한 이야기, 현실에 대한 이야기 그런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세상이 어떤지 너무 몰랐고, 누구 하나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앞만 보고 열심히 사는 것 밖엔 나에게 주어진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오십의 나이가 들어갈 때쯤부터 시간과 돈의 여유가 생기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고 그동안 좋아했던 책들은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변화하는 미래에 관심이 많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옛 고전에 눈을 돌려 과거의 이야기를 읽어 보았다. 그동안 전혀 읽히지 않았던 현대 소설도 하나씩 읽으며 메말랐던 감성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로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 ‘걷고 싶다’ 등의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나의 청춘이 이렇게 흘러갔구나 하며. 그렇게 책을 읽으며 보냈던 3년의 시간뒤엔 200권이 넘는 독서 목록을 만들었다. 그동안 읽었던 책 속의 글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고,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수정하고 다듬어 주었다.


올해는 주로 고전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브런치를 통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먼 북소리’,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와 소설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지금은 ’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있는 중이다. 그의 소설을 읽은 수많은 사람들 중 그저 일개 독자에 불과하지만, 그의 소설을 읽으며 조금씩 작가의 취향을 알게 되었다.


먼 북소리에서 작가는 1980년대 말 일본을 떠나 3년 동안 그리스, 이탈리아 등 여러 곳을 장기간 머물며 생활했다. 국내의 시끄러운 상황, 어떤 불편함이 그를 떠나게 했고, 그 3년 동안의 결실이 ‘노르웨이의 숲’이다. 하루키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대표작인 ‘노르웨이의 숲’은 현실을 떠나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며, 영미소설을 번역하고 여행기를 쓰고, 생활하고 지내며 탄생한 소설이다.


작가의 에세이를 몇 권 읽고,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이 작가와 닮았다는 것을. ‘노르웨이 숲‘의 주인공 와타나베와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작가와 닮은 듯한 인상을 품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현실에 있지만 왠지 아웃사이더 같은, 방관자적 위치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자기 삶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 중심에 있지만, 사건의 중심에서 내가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상대의 행동에 그냥 받아들일 뿐이다. 존재감 없이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되돌아본다. 그런 모습은 하루키적 색채일지 모른다.


그의 에세이를 보면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그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작가만의 감성이 제대로 녹아들어 있다. 작가는 와인, 위스키, 칵테일을 좋아하고, 턴테이블 위 LP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팝송을 좋아하고, 걷는 걸 좋아한다. 그는 날씨가 허락한다면 매일 달린다고 했다. 그의 취향처럼 소설 속 주인공들도 개인 차량보다는 지하철을 이용하거나 걷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의 개인적인 취향이 그대로 소설 속 인물들에게 흡수되어 있다. 그런 소설 속 인물, 하나하나가 하루키인 것 같다.


나와 나오코는 중앙선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만났다.

역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항상 1미터 정도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겨울에 나는 신주쿠의 조그마한 레코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상냥해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카운터에 앉아서 김렛과 마르가리타를 주문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작가의 책 속에 스며들어 있는 그의 색깔, 취향,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은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작가와 직접 대화하지 않아도 그를 조금 이해했다고 해야 할까.

예전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장면들이 나이가 들고, 책을 읽고, 사색을 하다 보니, 점점 소설 속 내용뿐 아니라 작가의 취향과 색깔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나의 취향 또한 구별되었다. 나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작가의 소설을 더 선호하게 되고, 공감하게 된다. 이런 구별이 생기면서 좋아하게 된 작가는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밀란 쿤데라, ‘달과 6펜스’, ‘면도칼’의 서머싯 몸, ‘수레바퀴아래서’, ‘싯다르타’, ‘데미안’의 헤르만 헤세, ‘이방인’, ‘페스트’의 알베르 카뮈 작가의 작품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이런 취향에 대한 선호는 아무리 유명하고 좋은 소설이라도 나의 취향과 맞지 않으면 거북함이 느껴지고 더 이상 읽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물론 위대한 작가의 작품은 끝까지 읽지만, 현대 소설의 경우는 그냥 조용히 덮는다. 이런 뚜렷한 구별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또한 나의 선택이고 선호인 것이다. 나와 맞지 않는 이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듯이, 책 또한 나와 결이 맞지 않으면 굳이 이 소중한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다.


지극히 현실적인 삶을 살다가, 이제 나의 과거를 돌아보니, 문득 내가 지독히도 현실적인 사람이었구나를 새삼 느꼈다. 내가 선택한 순간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 또한 나의 선택이었고 그런 선택으로 이젠 나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에 이만하면 충분하다. 앞으로의 삶은 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난 내가 원하는 길을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사유하고 생활하며, 나의 일을 하며 살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행운과 축복이 가득한 하루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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