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가운의 오월 시민군 - 제4화

현장의 의료진

by 조성현

하얀 가운의 오월 시민군 - 제4화

(이 글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의료현장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온몸을 내던진 의료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거리로 뛰쳐나가지는 않았지만 분명코 오월 시민군이었으며 동시에 피아를 가리지 않고 인간의 생명을 구한 히포크라테스의 후예였습니다. 당시 전남대 의대 인턴 - 현 광주시 소재 아동병원장 - 이었던 유용상 선생의 증언과 광주시의사회에서 편찬한 증언록 자료 및 5.18기념재단의 자료를 참조하였음을 알립니다.) <계간 수필미학 연재>

<현장의 의료진>

180여 개인의료기관들도 모두 문을 열었고, 부상자가 발생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하얀 가운을 입은 체 환자를 운반하여 치료하였다.


사태 초기 혈액이 부족하였을 때 의사, 간호사, 병원 직원, 청소부도 팔뚝을 걷고 헌혈했다. 이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나 나이팅게일 선서를 이미 뛰어넘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가만있을 의료진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집에 가거나 편하게 잠을 잘 여유도 없었다. 환자들이 몰리면서 수술하는 의료진이나 받는 환자 모두 온몸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정해진 근무시간 없이 24시간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응급실과 복도, 중환자실 어디에고 환자는 눕혀 있었고, 직원들도 아무 데나 누워 자곤 했다.

수술실도 안전하지 않았다. 의료진은 수술 중 창문으로 총탄이 날아왔지만 개의치 않고 수술에 집중하였다.

의료진들은 환자 치료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걸고 광분한 공수부대로부터 시민 학생들을 피신시켰다.


반상진 당시 광주시의사회장도 그중 한 분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지나가던 젊은이를 심하게 구타하는 장면을 진료실에서 보았다. 그는 가운을 입은 채 밖으로 나가 군인에게 말했다. “이 학생은 나에게 치료를 받는 환자요. 오늘도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오고 있었을 뿐이오.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주시지 않겠소?” 공수부대원의 흘겨보는 눈초리에 질려 왜 어린 학생을 때리냐고 묻지도 못했다. 군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빨리 치료해 주라고 했다. 젊은이를 병원에 데리고 와서 병원 뒤쪽으로 도망가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도 학생이 나오지 않자 화가 난 군인들이 병원으로 쳐들어왔다. 치료를 받고 나갔는데 보지 못 했느냐고 거짓말을 했다. 병원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군인들이 진료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화장실과 입원실까지 뒤졌지만, 학생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의사에게 주먹이 날아올 것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대기실에 앉아있는 많은 환자가 걸려서인지, 욕만 퍼붓고는 나가버렸다.

오충남 당시 동진외과의원장은 환자 차트를 숨겼다. 5·18 기간에 68명 환자가 치료를 받았고, 8명이 입원하였다. 진압봉에 맞고 머리가 벌어졌거나 다리에 파편 맞은 환자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진압봉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팔이 부러진 환자였다. 나중에 특수조사반이 조사하러 들이닥쳤지만, 그는 차트가 없다고 잡아뗐다. 당국에서 치료비 청구하려면 차트 복사해서 보내라 했다. 그는 치료비 청구를 포기했다. 차트가 공개되면 환자들은 분명히 잡혀가서 고초를 겪을 게 뻔했다.

병원 앞 정류장에서 학생들이 시내버스에서 내리자 다짜고짜 공수부대원들이 곤봉으로 휘둘렀다. 어느 학생이 피하다 쓰러지자 군홧발로 밟아 짓이기며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끌고 간 장면도 목격한 터였다.


실제 27일 도청 함락 후 군인들이 병원에서 환자기록부를 조사해 명단에 있는 시민들을 상무대로 끌고 가서 무자비하게 폭력을 가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차트를 숨긴 의사도 많았고, 차트에 기록을 남기지 않고 치료만 받은 시민들도 다수였다. 이들은 나중에 5.18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 의사들은 목숨을 잃은 분들을 적극 가담자와 단순 가담자로 분류해야 하는 고충 속에서 가급적 이들을 도우려 노력했다.

“그때 시체가 백몇십 구인가 상무관이라는 데 누워 있었어요. 그 당시 국가에서 단순 가담자는 보상 해주고, 폭도로 몰리면 보상을 안 해줬어요. 시신을 두고 폭도와 단순 가담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의사들의 기준은 총이 앞에서 뚫고 뒤로 나가면 적극 가담자이고, 등 뒤에서 총알이 들어가서 앞으로 나온 사람은 단순 가담자다 그런 식으로 기준을 잡았지요. 될 수 있으면 국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단순 가담자를 많이 만들었죠. 100명 이상. 근데 세월이 지나놓고 보니까 폭도로 몰렸던 사람들은 유공자가 되고, 말하자면 그렇게 역전이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그때 심사를 했던 교수님이 작년 의료인 현장보고 발표를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도 하셨어요. “내가 그때 그 사람들을 폭도로 했어야 이 사람들이 국가 유공자가 되는 건데 그랬다.” -유용상 당시 전남대의대 인턴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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