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할 수 없는 진실

수필 〈기억되지 못한 그 날의 이야기〉평설

by 조성현

망각할 수 없는 진실

- 〈기억되지 못한 그 날의 이야기〉평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노병인 화자가 호찌민의 전쟁증적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시작한 이 글은 국가는 부인하지만, 그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진실에 대한 고백이자 증언이다.


화자는 박물관 이름에서 문제점을 포착한다. 베트남은 백여 년에 걸친 프랑스 식민 침탈을 극복하였지만, 세계 최강 미국의 침략을 맞아 전쟁에서 이긴 승전국이다. 그러나 승리의 자부심보다 온 국토를 초토화하고 수많은 인민을 살상한 미국의 만행을 기록에 남기겠다는 베트남 국민의 의지로 ‘전쟁기념관’이 아닌 ‘전쟁증적박물관’을 세웠다. 화자는 박물관에서 그들이 겪은 참상과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증거를 보며 애써 그 기억을 지우려는 미국인 관광객 가운데 초라하게 서 있는 자신을 본다. 또한 ‘월남전참전용사’라는 자부심도 무너진다.


회상의 장면으로 넘어가며 전장에서의 쓰린 기억을 소환한다. 함께 밥을 먹던 전우가 쓰러지면서 오로지 적개심만 남은 자신을 기억하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전쟁의 악마성에 시달린다. 미군이 정글에 뿌린 고엽제를 그대로 맞은 화자는 이로 인해 젊은 나이에 당뇨병에 걸려 지금도 치료 중이다. 고엽제는 정글의 동식물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모두를 멸절시키는 제국주의의 잔인성을 상징한다.


귀국 후에도 그는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가 목숨을 내놓고 받은 참전 수당은 고향 땅에서 문전옥답의 구입비용이 되어 가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경제개발에 기여한 참전이었지만, 베트남에는 무엇이었을까.


베트남전쟁에 관한 미국의 기밀문서가 오래전 해제되었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도미노 이론으로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미국의 패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베트남을 침략한 것이다. 베트남 국민이 말하는 그 ‘더러운 전쟁’에 미국은 자국 내 반전 운동과 젊은이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한국에 경제원조를 대가로 참전을 요청하였다. 한국은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참전하였다. 그러나 화자가 말하고 현상이 증명한다. 미국이 패망하였어도 베트남은 소위 미국이 말하는 폐쇄적 공산주의가 아니라 개방적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하고 있음을. 화자는 부대에서 고참의 학대를 피해 월남에 자원하여 소총수가 되었다. 연인원 삼십사만여 명의 참전 장병 중 몇 명이 자유 수호의 이념적 가치를 추구하여 베트남행을 결심하였을까.


베트남 곳곳에는 미국과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고 새겨져 있다. 미군과 한국군의 양민 학살과 마을 파괴가 얼마나 극심했으면 만대를 기억한다고 하였을까.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베트남참전전우회는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자유 수호와 양민 학살을 인정하면 자기부정에 빠지게 되므로 이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을 방문한 피해자 가족 앞에서 참전 장병들은 군복을 입고 민간인 학살은 없다며 강하게 부인하다.


화자는 베트남의 전쟁증적박물관을 통해 참전용사로서 자부심이 여지없이 무너졌고, 참상의 증거 앞에서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더 나아가 그는 고백한다. 이 전쟁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국가와 참전 장병들이 부인하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도 사실이라고. 참전 노병의 고백은 그 자체로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다. 이는 국가 등 타자의 공격을 감내해야 함은 물론 오랜 세월 그가 품었던 자부심과 젊은 시절 베트남에서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백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국가가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하였지만, 광주 5.18 당시 가해 군인이었던 공수부대원들의 증언도 큰 용기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국가는 외면하고 있다. 더 외롭고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고백이자 증언이 이 글이다. 고백의 문학으로써 백미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현재의 박물관 방문과 과거 베트남으로의 출정과 전투 등의 회상, 귀국 이후의 후유증과 반성에 이어 다시 박물관에서의 성찰로 이어지는 수미상관의 순환적 구조를 취한다. 과거의 역사에 머물지 않고 베트남전의 실상을 현재 시점에서 다시 보여줌으로써 진실에 더욱 가깝게 다가간다.


현장성이 강한 묘사가 돋보인다. ‘네이팜탄에 검게 타버린 시체, 고엽제로 인해 사산된 태아를 포르말린에 넣어 보존한 병,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수, 베트남에 뿌려진 포탄과 실탄의 수’ 등등 설명보다 강한 실체적 참상을 보여줌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사실적이고 서사적 묘사와 함께 내면의 독백이 교차하는 문체적 특징을 보여준다.


제주도민의 10%가 희생된 1948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에는 혹독한 탄압이 따랐고, 오십여 년이 지난 2000년에야 대한민국 정부가 지난 과오를 인정하며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1948년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된 여순사건도 역시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오십여 년을 기다려야 했다. 희생자 가족과 진실을 요구하는 성숙된 시민의식이 무도한 권력의 탄압을 뚫고 이뤄낸 성과다. 이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하물며 베트남이라는 먼 타국의 사건을 국가가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안규수의 이 고백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마중물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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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원문>


기억되지 못한 그 날의 이야기 / 안규수


이태 전 봄 아들이 거주하는 베트남 호찌민시를 방문했다. 이튿날 전쟁기념관에 들렀다. 그런데 이곳 공식 명칭은 전쟁기념관이 아니고 ‘전쟁증적박물관’이었다. 증적(證跡)은 증거가 될만한 흔적이나 자취를 뜻한다. 즉 역사가 남긴 자취를 통해 전쟁을 되새기고 기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베트남은 ‘항미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다. 세계 최강 미국을 이긴 입장에서 그 자부심을 ‘기념’이라는 단어를 쓸만한데, 그러기보다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앗아갔는지 자자손손 잊지 않기 위해서 전쟁기념관 대신 전쟁증적박물관이라는 명칭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의 전시실에는 오랜 전쟁의 시간이 정지된 채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네이팜탄에 검게 타버린 시체, 고엽제로 인해 사산된 태아를 포르말린에 넣어 보존한 병, 전쟁으로 죽은 사람의 수, 베트남에 뿌려진 포탄과 실탄의 수, 그들이 ‘더러운 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군인이 투입되었고 죽었는지, 그로 인해 베트남이 얼마나 초토화되었고, 얼마나 많은 베트남인이 죽고, 현재까지 고통받고 있는지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가 파병한 한국군이 작전 중 학살한 민간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에는 수십 구의 민간인 시체가 이리저리 뒤엉켜 있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기억되어야 할 죽음과 기억을 지우려고 애쓰는 미국인 관람객 가운데에는 초라한 나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1968년 4월 부산항에서 미군 수송함에 몸을 싣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부두에는 환송 나온 수많은 가족 친지와 학생들이 부디 살아서 돌아오라고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이 물결을 이루고, 그 가운데에는 하얀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훔치던 아내도 있었다.

6일간 남중국해를 항해한 끝에 냐짱 항에 도착하여 백마 28연대 도깨비부대 S중대에 배치되었다. 베트남 중부 뚜이호아는 남중국해를 끼고 백사장이 수 킬로미터 뻗어 있는 아름다운 해안 도시였다. 그러나 이곳은 베트콩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격전지였다.


나는 근 1년 동안 전투에 참여하여 생사를 넘나드는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살벌한 전쟁터, 조금 전까지 C레이션을 같이 먹던 전우가 총에 맞아 죽고, 어젯밤에 어머니와 애인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훔치던 친구가 포탄에 맞아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현장에서 휴머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투 중 전우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인간으로서 이성을 상실한다. 오직 적개심만 남아있을 뿐이다.

베트콩은 항상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법으로 아군을 괴롭혔다. 그러니 뚜렷한 전선도 없고, 베트콩과 민간인을 구별하기란 더욱 어려웠다. 1968년 가을쯤으로 기억하고 있다. 인근 중대에서 야간 매복으로 30여 명에 가까운 베트콩을 사살한 전과가 있었다. 날이 밝아 사상자를 수습하고 보니 인근 마을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신분만 민간인이지 그들 모두 베트콩이었다.


정글에서 작전 중에 미군 수송기가 뿌연 안개 같은 것을 자주 살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낙엽을 지게 하는 인체에 치명적인 고엽제라는 화학물질이었다. 나는 30대 중반부터 고엽제 피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앓기 시작한 당뇨병과 고혈압은 현재 진행형이다. 3년 전 당뇨합병증으로 가벼운 뇌경색이 발병했다. 국가유공자가 되고 고엽제 피해자로 분류되어 정부의 치료는 받고 있지만, 그날의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고 있다.


귀국 후 한동안 치열한 전투 현장의 악몽이 발현되는 트라우마로 밤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밤새도록 나는 그 지옥 같은 바다를 떠다녔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창밖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고, 두렵고 가슴 아픈 참혹한 광경만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이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국가는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고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매월 꼬박꼬박 보내준 돈을 모아 문전옥답 서 마지기를 장만하여 살림살이에 큰 보탬이 되기도 했다.


전쟁증적박물관에서 전쟁의 끔찍한 실상을 보는 순간 그동안 지켜온 나의 자부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잊히지 않는 그 날의 일들은 달리 생각해 보면 나의 잘못이나 죄가 아니다. 그럼 누구의 죄일까. 그런데 이 말을 곱씹을수록 의미가 다르게 느껴졌다. 너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지 않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지구상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없어야 한다. 전투 현장에서 아무런 원한 관계없이 서로 죽일 수밖에 없었으니 어찌 이런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부조리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기억의 틈이 너무 넓다.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쟁을 ‘경제발전의 계기’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학살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2018년 봄 베트남 피해자 가족이 보상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참전전우회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 앞에서 전투복을 입고 ‘우리는 민간인을 죽이지 않았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항의 시위를 했다.


나는 이 전쟁에서 기억에 기대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시 정부에서 말하는 참전의 명분은 우방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같은 분단국인 조국이 도미노 현상으로 공산화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전쟁이 패전으로 끝났어도 그것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반면에 전쟁을 통해 희생된 민간인들의 진실은 어떠한 명분에도,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뿐더러 정당화될 수 없다. 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글은 말이 없다. 우거진 숲의 나무들이 자신들이 본 것을 모두 기록하고 말할 수 있다면 역사는 달라질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그 나무들이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감당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해답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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