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이 있어 해마다 이십여 일 집 나가는 남편을 대신하여 매일 일터에 나가랴, 집안 일하랴, 견공 두 놈 건사하랴, 시집 장가간 딸 아들네 신경 쓰랴, 고생하는 아내에게 한마디 한다. “여보, 고맙고, 미안합니다.”
다시 출발하며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상주행 고속버스 승차권을 두 번 구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승차권을 주머니에 대충 넣었다가 핸드폰 꺼내면서 분실했다. 출발 5분 전에 알게 되어 부랴부랴 다시 구입했다. 출발부터 삐걱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꿨다. 더 큰 실수를 하지 않도록 가볍게 수업료 지불한 것이라고.
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작년 도보여행에 신었던 것을 그대로 신고 왔다. 장거리 도보여행에서는 주로 아스팔트 길을 걸으므로 나는 무겁고 딱딱한 등산화보다 트레킹화를 신는다. 수백 킬로미터를 걸으면 신발이 많이 닳기에 다음에는 교체한다.
이번 여행에서 작년에 신었던 것과 색상까지 동일한 새것으로 준비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며 무심코 헌 신발을 신었다가 상주터미널에 와서야 알았다. 작년에 신고 걸었고, 1년 동안 아침 도보 운동하며 신었던 것이라 바닥 쿠션도 약하고 뒤축은 닳아서 속살이 보이는 상태였다. 신발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 없다. 이거야말로 낭패다.
또 생각을 바꿨다. 너덜거리기 전까지 신다가 안 되면 아무거나 사서 신으면 되겠지 뭐. 옛사람들은 짚신 신고서 천 리 길 과거시험 보러 가지 않았던가. 그에 비하면 ‘아무거나 신발’은 비교가 안 되게 좋지 않은가. 그러면 됐다.
<비와 배낭>
도보 여행자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비’다. 작년엔 첫날부터 퍼붓는 비를 맞고 30km 걷느라 녹초가 되었다. 셋째 날엔 장대비에 온몸이 젖어 덜덜 떨며 걸었다.
아래위 우비를 입으면 안과 밖으로 땀과 물이 줄줄 흐른다. 밤새 내리던 굵은 빗줄기가 고맙게도 아침에는 얌전한 가랑비로 바뀌었다. 우비 상의만 입고 한 시간 정도 걷다 보니 비가 그쳤다. 공기가 상쾌하다. 대형트럭이 지나가도 흙바람이 아니어서 괜찮다. 길가에 원두막처럼 생긴 쉬기 좋은 정자에 올랐다. 우레탄 지붕이지만, 해서와 행서를 섞은 듯한 학수정(鶴首亭) 현판이 제법 멋을 더한다. 주변에는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 누구든 지나는 길손의 피로를 덜어준다.
도보 여행자를 힘들게 하는 두 번째는 배낭 무게다. 줄이고 줄여도 식수를 지니고 다녀야 하므로 10kg이 넘는다. 배낭 무게가 완주를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는 숙소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 민박이나 여관에서 제공하는 물을 먹지 않으므로 식수 지참은 필수다. 세제와 수세미가 없어서 양은냄비와 휴대용 수저는 화장실 휴지로 닦고 물로 헹구면 설거지 끝이다. 점심에도 마땅히 먹을 곳이 없어 구운 계란 두 개와 사과 하나로 때웠다. 어제저녁 민박 겸 식당 여주인이 준 굵은 사과가 요긴한 식사가 된 것이다. 구운 계란은 쉽게 상하지 않고 배도 채울 수 있어서 대체식량으로 괜찮다. 뭐든 먹으면 된다. 내 몸도 점점 현장화되어 간다.
도보여행에서 빨리 걷는 건 금물이다. 배낭 무게가 있어서 속보는 무릎과 발에 부담을 준다. 난 평소 빨리 걷는 편이라, 별생각 없이 걸으면 빨라진다. 계속 신경 쓰며 걷는다. “멀리 가려면 천천히 가라.”
<물장수 상>
아침 점심을 대충 먹어서 그런가, 저녁 식사에 백반을 먹으며 8가지 반찬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미소를 건넨다.
서울 토박이만 아는 단어로 ‘물장수 상’이란 게 있다. ‘물장수 밥상’의 준말이다. 나는 그 말을 서울 14대째 토박이인 처가에서 들었다. 일제강점기 상수도가 미비했던 서울에서 웬만큼 사는 가정집은 물장수가 길어온 물을 사다 먹었다. 물을 길어 팔던 이들이 그 유명한 북청물장수다. 강인한 함경남도 북청 사람들이 서울 와서 물장사하며 자식을 교육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물 길어 먹는 집에서는 북청물장수에게 툇마루에 밥상을 차려주곤 했다. 그들은 밥 한 톨은 물론 반찬도 남김없이 먹었단다. 산중 스님들의 발우공양이 서울로 내려온 셈이다. 어렵게 버는 족족 자식 교육에 갖다 바치는 그들이었으니 음식 한 점 남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를 두고 서울 사람들이 ‘물장수 상’이라 한 것이 그 유래다. 나도 걷다 보면 뭐라도 먹을 때마다 늘 물장수가 된다.
<임란북천전적지(壬亂北川戰跡地)>
북천을 따라 25번 국도로 상주에 들어가면 왼쪽으로 상주 임란북천전적지를 만난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중앙군 60여 명과 밤새 모집한 향군 800여 명 등 900여 명이 왜군의 선봉 주력부대 1,700명과 싸워 900명 전원 순국한 곳이다. 향군은 지역 장정을 모아 급조한 부대였다. 제대로 된 훈련은커녕 병장기 다루는 법도 알지 못하던 농민들이다.
순국은 맞는 말이지만 그들은 전쟁을 대비하지 않고 국방을 게을리한 무능한 왕과 국가 운영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상주 초입인 이곳에서 북천을 내려다보며 언덕에 자리 잡은 전적지에 충열사를 세웠다. 관군 지휘관과 의병장 8명과 무명 열사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배향 행사가 열린다. 내일은 상주를 떠나 점촌 입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