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전체 일정 중 1/3이 지났다. 얼마 전, 지인이 조언해주었다. 전 일정을 삼 등분하고 각각 마치면 그만큼 완주한 것으로 생각하라고. 그러면 마음에 부담이 덜어질 거라고. 오늘 1/3을 걸었지만, 나는 즐기러 다니기에 부담은 없다.
며칠 전 아내에게 새로 산 트레킹화를 제천우체국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전 집을 나서며 무심코 작년에 신고 걸었던 낡은 트레킹화를 신고 나왔다. 우체국에서 새 신발로 갈아 신고, 잘못 신고 온 작년 신발을 집으로 보냈다. 편리한 세상이다.
어제 숙박한 청풍면에 벚꽃축제가 열렸다. 축제가 열리는 곳은 어디나 그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임시 천막에서 각종 음식을 끓이고, 튀기고, 굽는다. 몇 가지를 제외하면 어디나 음식이 비슷하다. 전통음식이라고 하나 잘 모르겠다. 저녁부터는 각설이 타령과 트로트 메들리 노랫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밤 11시 넘어까지 찌렁거린다. 피로에 지쳐 민박집에서 잠을 청하던 나는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특색있는 축제를 열기에는 아이디어가 빈곤한가.
아침의 청풍면은 청풍명월의 고장답게 아름다웠다. 활짝 핀 벚꽃과 청사초롱이 달린 길을 걷는 맛에 어제의 피로가 가신다. 1.2km 사장교(斜張橋)인 청풍대교를 건너기 전 청풍문화재단지가 보여 다가갔다. 충주다목적댐 건설로 인근 24개 마을이 물에 잠겼다.
나는 실향민 후손이다. 아버지가 6.25 때 북에서 피란 내려오셨다. 전쟁과 무관한 실향민들이 있으니, 수몰된 마을을 고향으로 두고 계신 분들이다. 북이 고향인 분들은 고향 근처에도 갈 수 없으나 이곳 충주댐 실향민들은 비록 물 속이지만 지척에 갈 수도 볼 수도 없으니 애닲은 심정이 무척 클 것이리라.
남한강 유역인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하여 선사시대 이래로 석기인들이 거주하였고,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에서도 요충지여서 다수의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었다. 당국에서는 수몰로 이전이 불가피한 문화재와 지석묘 등을 이곳으로 옮겨 원형대로 보존하였다. 입장 시간이 일러서 입장을 못 하고 길을 재촉했다.
청풍호를 왼쪽에 끼고 휘휘 도는 길을 따라 걷는다. 청풍호 옆에서 우뚝 선 금월봉을 지나는 중이었다. 금월봉은 모 시멘트 회사가 점토 채취하다가 기암괴석을 발견하였다는데, 그 모양이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빼다 박았다. 두루 살펴보았다. 실로 기묘한 모양의 바위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을 지나다가 갑작스러운 발가락 통증에 주저앉았다. 어제 왼쪽 새끼발가락에 잡힌 물집을 따고 건조시켰으나, 다른 발가락 물집이 터진 것이다. 걷다가 물집이 터지면 꽤 아프다. 양말을 벗어보니 양말과 신발 안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늘 하던 대로 물집을 짜내고 소독약 바르고 종이 반창고로 동이고 다시 걷는다. 휴식을 취하다 걸으면 통증이 무척 심하지만 십여 분 걸으면 무뎌진다.
<길과 사람 누가 먼저 일까>
길이란 사람이 밟고 지나며 생겨났다. 길이 생겨나서 사람이 지나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걷기에 적절한 곳을 찾아 길을 내었다. 길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기 위해 사람이 만들어 놓았다. 길에는 사람이 있어야 아름답다. 길에는 생명이 존재한다. 길은 사람이 다니며 원래의 지형에 따라 만들어 놓았기에 그 모습은 모두 다르다.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인 것처럼 길도 자연 속에 존재한다.
오늘 오후에 걸었던 4차선 도로에는 사람은 없고 기계와 물건만 오갔다. 그곳에서 사람은 기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기계 밖으로 나오면 이동할 수가 없다. 나도 웬만해서는 4차선 도로로 걷지 않는다. 오늘 제천시로 향하는 길은 4차선 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 탱크로리, 덤프트럭, 대형화물차, 버스뿐만 아니라 승용차까지 굉음을 내며 쏜살같이 지난다. 자동차가 일으키는 흙먼지 속에서는 오직 걸음만 뗄 뿐이다. 사색은커녕 숨쉬기도 녹록지 않다. 오직 몇 킬로가 남았는지만 관심이다. 오늘 무척 피곤한 이유 중 하나가 4차선을 걸었기 때문이다.
청풍 길가에 몇몇 떡갈비집이 손님을 부른다. 도보 여행자는 눈으로만 맛을 본다. 나 홀로 여행은 숙박비를 혼자 부담해야 하므로 비용이 적지 않게 든다. 음식은 오로지 에너지를 내기 위해서만 필요하다. 하긴 산해진미 먹으며 다닌다면 걷는 맛도 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