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는 경사진 밭이 흔하다. 오늘도 지나며 경사진 밭에서 허리 굽혀 일하는 부부를 보았다. 노인들이다. 논농사는 봄철 모내기 때 기계로 심고 가을철에는 기계로 수확한다. 못줄 잡고 여럿이 줄지어 모를 심는 모습은 빛바랜 사진에서나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벼가 자랄 때 논에 들어가 잡초인 피를 뽑느라 살이 베이고 찔리곤 하였다. 지금은 벼가 자랄 동안에 제초제 칠 때만 논에 들어간다.
그러나 밭에는 수시로 들어가야 한다. 대규모 밭농사는 사람을 사서 경작하지만 웬만한 규모는 자작한다. 밭농사는 서서 하는 일이 없다. 허리를 굽혀야 한다. 평지 밭도 무척 힘이 드는데 경사진 밭에서는 몇 곱절 힘이 들 것이다.
오늘 트랙터로 경사진 밭을 가는 모습에 눈보다 귀가 먼저 다가갔다. 트랙터가 밭을 갈 때 쇠갈퀴와 돌덩이가 부딪히며 그렁그렁 내는 싸움박질 소리가 요란하다. 산비탈이라서 흙에 돌이 많은 탓이다. 큰 돌은 밭 가장자리로 옮겨 놓았지만, 밭에 가득한 자자란 돌부터 주먹만 한 돌은 모두 치우기 어렵다. 체력 좋은 트랙터도 끙끙 신음을 토해낸다. 그러니 경사진 밭에서 일하는 농부는 얼마나 힘이 들까 싶다. 이 척박한 땅에서도 밭을 일궈 작물을 키워내는 농부들의 땀과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왜 굳이 산비탈에 경작할까. 땅 한 뙈기 없어 깊은 산으로 들어간 민초들은 화전을 일구어 생존을 이어갔다. 화전민이 아니면서 허리가 휘어지도록 경사진 밭을 가꾸는 건 평생을 농사짓던 농부들이 땅을 놀릴 수 없고 그 땅을 부쳐야만 먹고 살 수 있기 때문 아닐까.
도시도 마찬가지다. 서울 봉천동, 삼양동, 해방촌, 중계동 백사마을 등 서울과 경기 곳곳에는 농촌에서 축출되어 도시로 유입된 빈민들이 산자락을 깎아 비바람을 피해 살던 달동네가 널려 있었다.
서쪽 방면 산으로 둘러싸인 부산에서는 전쟁 피란민들이 밀어닥치며 감천마을 산자락과 왜인들의 공동묘지였던 비석마을에 터를 잡았다. 화전민이나 달동네 주민이나 모두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친 것이다.
개발주의자들은 서울의 달동네를 도시 재개발 명목으로 갈아엎었다. 원주민들은 또다시 축출되고 외지인이 점령하며 고가의 아파트가 군락을 이루었다.
지금도 산자락에 밭을 일구는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경작지 확대가 형질 변경 후 매매 차익을 위한 것이며, 산림을 훼손한다는 주장도 있다. 민초들 생존의 터전이었던 산자락 밭도 의미가 퇴색되는 것인가.
<오늘의 이모저모>
아침에 출발하면서부터 오르막 다래산 길로 접어든다. 이 길 따라 3km 오르고, 3km 내려가서 평창강과 만났다. 휘휘 돌고 도는 오르막인데 몸은 가볍다. 몸이 길에 적응한 때문이다. 인생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지만 도보여행에서 내리막은 반갑지 않다. 내리막은 무릎 연골을 공격하므로 천천히 걷는다. 흙이 보이면 무조건 디딘다. 내 경우 속도는 오르막에서 빠르다. 오를 때 공기가 맑아서 그런가, 숨도 차지 않다. 지나는 차도 어쩌다 보인다. 새소리가 향기롭다.
오늘은 산길을 내려와서 내리 평창강을 옆에 끼고 평지를 걷는 호사를 누렸다. 평창강은 굽이굽이 돌고 돌아 지형대로 흐른다. 나도 따라 돌고 돈다. 여기에서는 제발 개발이라는 이름을 대고 삽질하지 않기를 바란다.
도착지 노론리 길가에서 숙박할 평창까지 이번에도 지나가는 차에게 공손히 손을 들어 태워주십사 부탁했다. 십여 분 지나 SUV 한 대가 멈췄다. 그는 부동산 소개업자인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평창이 살기 좋다며 여기 집 살 마음 있으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건넨다. 꾀죄죄한 도보 여행자인데 평창에 집 살 만큼 돈이 있어 보였나?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