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둔재터널을 지나 한참을 걷다가 길가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목재를 가득 실은 오래된 트럭이 지나갔다. 제무시(GMC) 트럭이었다. 이차세계대전에서 미군이 사용하였고, 육이오전쟁 후 미군이 두고 간 군용트럭을 개조한 화물차다. 어렸을 적에는 심심찮게 보았는데 지금은 워낙 오래되어 귀해졌다. 운전석 앞 커다란 엔진룸에 보닛은 얹혀있지만, 옆 커버는 어디론가 달아나 내장이 다 보인다. 70년 넘도록 무거운 짐만 지고 달렸으니 이제는 쉴 때가 되었건만 쓰러져 널브러질 때까지 짐을 이고 다닐 것이다. 쓰러지면 산산이 분해되어 고철로 팔려가겠지.
비행기재터널을 지나 한참을 내려오다가 도로 옆 밭에서 워워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다. 큼지막하고 휘어진 뿔을 단 덩치 큰 황소가 쟁기를 끌고 있었다. ‘소’ 하면 등심, 불고기, 육회, 소갈비, 설렁탕, 도가니탕, 꼬리곰탕 등 먹거리가 먼저 떠오를 정도로 이제는 일하는 소의 이미지가 사라졌다. 코뚜레나 멍에, 쟁기도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으니 횡재가 아닐 수 없다.
고랑을 따라 쟁기를 끌다가 밭 끝자락에서 주인이 한쪽 줄을 당기며 워워 하니까 소는 방향을 튼다. 가까이 다가왔을 때 노인 농부에게 소 나이를 물었다. 17살이란다. 소 평균수명이 20살이라, 저 황소도 무기한 휴가에 들어갈 날이 머지않았다. 제무시처럼 명을 다할 때까지 일만 하다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찢겨 구이가 되고 국물이 되겠지. 무생물과 생물이지만 제무시와 황소의 운명이 저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한참 동안 일하는 황소를 보고 있었다. 제무시도 힘이 세고 고장이 없어 지금까지 버텼고, 일하는 황소도 지금껏 밭을 갈고 수레를 끌었기에 살아 있었다. 고장 나거나 일을 못 하면 진즉 폐기처분 되었을 것이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제무시나 황소와 같은 그러한 마지막 운명을 맞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백세 시대라고 좋아들 하지만, 만세 부를 일인가. 정신이 희미해지고 육체도 소멸의 길로 들어서며 콧줄로 음식을 받아 연명하던 백세 시대 어느 분의 이야기에서 바벨탑이 떠올랐다. 아무리 정신이 온전치 못하더라도 불편한 것은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러 번 콧줄을 뜯어내자 병원에서는 두 손을 침대에 묶었다. 그러자 그분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본능적 저항이었다. 두툼한 거즈가 입을 막았다. 병원에서는 보호자에게 치아는 더 이상 필요 없으니 뽑자 하였다. 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노인은 생을 달리하였다.
의술과 약물의 개발은 백세 시대를 만든 일등 공신이다. 그 개발이 과연 인간의 삶을 위해서였을까? 어림없다. 욕망의 상한선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자를 뛰어넘으려는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 속성이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이 자신과 어깨를 견주려고 세운 바벨탑을 무너뜨렸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전설로만 남았다. 현대판 불로초를 만들려고 인간은 백세 시대라는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지만, 절대자는 100세라는 재앙을 내려 인간에게 앙갚음한다. 생물학적 죽음만 면한 100세들도 바벨탑의 희생자다.
자유 의지가 박탈당한 그들은 자기 삶과 목숨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백세들의 자식들도 노인이지만 노부모 모시느라 허리와 몸뚱이가 휜다. 그들도 100세가 되면 그들의 자식인 노인들도 허리가 휘겠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때 되면 죽어야 한다. 그래야 남아 있는 자들도 산다. 그게 자연의 순리이고, 절대자의 섭리다. 나는 내 삶과 목숨에 관한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검토하고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영생을 빌미로 무너진 바벨탑을 계속 쌓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구 환경 오염에 대한 인간의 자정 능력은 이미 상실하였다. 우주 생멸의 절대자는 계속 파괴할 것이고, 지구는 소멸의 길로 들어섰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임종 전에 인위적 생명 연장을 거부하였다. 마지막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나도 공감하였다. 그 후 7년이 지나 연명의료 결정법이 제정되고, 2년 후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임종 과정의 환자가 자기 자신 또는 가족의 동의로 연명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나는 2019년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하였다. 나이에 비해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기에 생각난 김에 해 놓았다. 나는 죽을 때가 되면 죽게 놔두는 게 순리라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성에 기준선이란 게 있을까. 철학적으로는 죽었지만,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 하여 존엄성을 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