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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높은 곳, 망자의 유택 - 38화

강원도 평창 진부

by 조성현 Jan 28. 2025

저 높은 곳, 망자의 유택 / 진부  

   

12일 차(4월 17일)

평창 진부 장전계곡~평창 진부면 22km / 누적 284km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여기저기 야산 중턱에 머리털이 한 움큼 뽑힌 것처럼 나무가 팬 곳을 자주 본다. 가족 공동묘지다. 근래에 화장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여 90%가 넘었다. 납골당, 수목장, 산골(散骨) 등 화장 후 처리 방식이 다양해졌지만, 여전히 묘지 면적은 상당히 넓다.


걷다 보면 가파른 야산 중턱에 조성된 망자의 유택를 종종 본다. 오늘도 보았다. 죽은 조상 때문에 산 후손들이 저 높은 곳까지 관을 둘러메고 오르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때마다 성묘하느라 자손들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했을 것이다. 고인이 세상에 얼마나 이바지했길래 죽어서도 산 사람들 고생을 시킬까. 조상 뫼를 잘못 쓰면 후손이 해를 입는다는 조상 숭배 사상에 충실한 망자의 심술인가. 망자가 생전에 저 높은 경사지에 뫼를 쓰라 유언하지 않았다면 조상을 기리는 자손이 고운 마음씨를 지녔을 것이다. 나는 저 무덤의 주인을 알지 못하지만 죽은 이들은 산 자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할 것이다.


조상 때문에 자손이 원수가 되기도, 조상 덕분에 형제가 친밀한 정을 나누기도 한다. 지인의 자식들은 망자가 남긴 알량한 재산에 눈독을 들여 장례식장에서 싸움박질하더니만 두 형제가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내 형제들과 자손들은 부모님 기일에 하나도 빠짐없이 모인다. 몇 년 전부터 부모님 기일에 제사 대신 기일 모임을 한다. 증조부모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모여 친교의 장을 펼친다. 나와 형님 손주들은 요즘 같아서는 멀다면 먼 6촌 간이지만, 친형제 남매같이 친하게 지낸다. 모두 부모님 은덕이다. 나 죽어서도 내 자식들과 손주들과 증손주들이 웃으며 모이려면 살아서도 나는 밑바탕을 만들어야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오래 병치레하면 자손들은 지치며 사이도 벌어지곤 한다. 내 아버지는 한 달여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가셨고, 어머니는 전날도 나와 통화하였는데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가슴에 슬픔이 깊이 박혔다. 다만 형제들은 별 고생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오래 병석에 계셨다 하여 그것을 고생이라 하면 불효막심이라 흉볼지 모르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내가 100세가 되었을 때를 가정해서 글 하나 썼다. 이렇게라도 내 생을 스스로 정리할 수만 있어도 복 받은 목숨이다. 과연 가능할까.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언제였던가. 올해는 2059년. 내가 태어난 지 100년 되는 해이다. 백 살까지 살았으니 매 순간이 나에게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백 살 넘게 사는 노인들도 많아졌지만, 남들 도움 없이 혼자 밥해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한 살 아래인 아내와 나는 타인의 도움 없이 살고 있다. 일전에 정기 치매 검사를 받았다. 치매가 진행 중이란다. 내 나이에는 급속히 진행된다고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마 전에 뇌경색이 찾아와 거동도 힘들어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머잖아 내가 최악으로 여기던 삶이 될 것이다.


구십을 훌쩍 넘긴 어떤 이는 요양병원 침대에 묶여 피딩 호스로 음식물을 공급받아 연명했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이들은 대부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인간이 받아야 할 최소한의 존엄성도 보장받지 못하고, 생물학적 생명만 유지하다가 종래 죽어서야 세상 빛을 볼 수 있다. 오장육부가 그런대로 괜찮은 것은 오히려 재앙이다. 이들은 몇 년씩이나 주사 줄과 생명 줄을 몸에 주렁주렁 달고서 살아간다. 소화 기능이 원활한 나도 정신 줄을 놓게 되면 오래도록 저렇게 살 것 아닌가. 수십 년 전 내 나이 육십 대 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임종 때가 되면 연명의료 하지 말고 저세상에 갈 수 있게끔 자식들에게도 누누이 내 뜻을 전했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지금 곡기를 끓고 100년 내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중이다. 오늘로 오 일째, 별다른 고통도 없다. 다만 기운이 없을 뿐이다. 열흘 남짓이면 눈을 감을 것이다. 죽은 내 얼굴이 찡그려 보이지 않도록 지금부터는 미소만 지으려 한다.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나도 내 물건을 틈틈이 정리한다고 했지만, 서랍에는 잡동사니가 그득하고 서재에 책도 산더미라, 물욕이 큰 내 죄 때문에 자식들 고생시키게 된 점이다. 91세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다. 장례 치르고 유품 정리하며 보니까 금전출납부와 돋보기안경, 한밤중 잠이 깨면 듣던 라디오와 하루 운수 보던 화투, 그 외 소소한 물건 몇 가지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유품 정리는 단 몇 분 만에 끝났다.

서서히 내 몸과 마음은 가벼워지고 있다. 조용히 누워서 이승과의 이별을 기다리는 중이다.     


<오늘의 이모저모>


오대천 옆 산골 민박에서는 빗소리와 바람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열악한 민박, 이가 아파서 씹지도 못하고 목구멍으로 넘긴 라면 두 개와 세차게 흐르는 계곡 물소리는 완벽한 부조화 속에서 색다른 조화를 이루어 신선한 하룻밤이 되었다. 밤새 내린 비로 민박집 옆을 흘러 오대천으로 합류하는 계곡물은 무섭게 불어나며 거세게 휘돌아 친다. 민박집에서 국도 59호선 오대천까지 걸어 내려왔다. 세찬 계곡물 소리와 뒤늦게 기지개를 켠 개나리, 숲에 파묻힌 촉촉한 도로. 발걸음이 가볍다. 


다시 오대천을 따라 걷는다. 이 길은 곳곳에 도로공사로 길을 뒤집어 놓아 걷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어제보다 물은 엄청나게 불어 있었다. 여러 마리 왜가리가 낮게 비행하다 물가에 자리 잡고 목을 길게 뺀 채 먹이를 노려보고 있다. 


여우 피하니 호랑이가 나타난다는데, 오늘은 호랑이 피하니 늑대를 만났다. 어제와 오늘 거센 비를 잘도 피했다. 이제는 세찬 바람이 문제다. 추워서 바람막이 외투를 입고 모자에 장갑까지 꼈다. 몸이 날려갈 듯하다. 갑자기 햇빛이 요란하게 춤춘다. 구름 사이로 가늘고 길게 하늘이 열리며 해가 비치는 순간, 거센 바람이 반복해서 구름을 헤집은 것이다. 나에게도 햇빛이 슬쩍 지나간다. 어제까진 햇볕이 따가워 그늘을 찾았지만 하루 만에 다시 해를 찾는 나는 참으로 간사하다. 비 온 뒤라, 오대천 건너 산자락 곳곳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폭포처럼 내려온다. 


진부까지 22km 걸었다. 이번 도보여행의 절반을 넘었다. 진부에서 나를 격려해주고 싶어서 규모는 작아도 명색이 관광호텔에 묵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커다란 배낭을 멘 나에게 호텔 프런트 여직원이 호기심에 뭐 하는 사람인지 묻는다. 국토종단이라는 말을 꺼내기 싫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 둘러댔다. 내일은 이승복기념관을 지나 드디어 운두령 자락까지 간다.


장전계곡 숙소에서 오대천길로 내려오는 3.5km 길장전계곡 숙소에서 오대천길로 내려오는 3.5km 길
비가 많이 와서 물살이 거칠다비가 많이 와서 물살이 거칠다
경사지 밭경사지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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