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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계곡에서 먹은 라면 두 개 - 37화

평창 장전계곡

by 조성현

장전계곡에서 먹은 라면 두 개 / 평창 장전계곡


11일 차(4월 16일)

정선역~오대천길~장전계곡~평창 진부 장전리 21km / 누적 262km

오늘이 4월 16일이다.

지난 1차 국토종단을 할 때였다. 세종시 끝자락에서 천안에 접어들었을 때 아내가 전화를 걸어왔다. 수학여행 가는 학생 수백 명 태우고 인천항을 출항하여 제주로 가던 배가 전라도 앞바다에서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 알다시피 내가 몇 년 전에 인천에서 세월호 규모의 큰 배를 타고 제주 갔었잖아. 워낙 배가 커서 문제없어. 안심해.”


걷던 중 아내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배가 뒤집히고 있었다. 걸음을 멈췄다. 세상에 이럴 수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한동안 걸을 수가 없었다. 전후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분명코 어른들의 잘못으로 피지도 않은 어린 생명이 처참하게 죽어간 것이다. 죄스러움에 가슴을 쳤다.


첨단을 달리는 2014년에 어떻게 그 큰 배가 가라앉았나. 국가는 뭐 했길래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 명 목숨이 스러지게 놔두었나. 도대체 국가는 뭐 하고 있었나. 배가 기울기 시작했을 때, 국가에서 해경에 긴급 구조명령을 내렸다면 구조했을 게 아닌가.


이제 몇년 지났다. 혹자는 말한다. 이제 세월호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죽어간 학생들의 부모는 말한다. 자신들도 그러고 싶다고. 그러나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는지 진상이라도 규명되면 맺힌 한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을 거라고.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참혹하게 당한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의 피맺힌 절규.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진상규명과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다. 오늘도 걷다 보니 벚꽃이 꽃비가 되어 하늘하늘 내려앉는다. 가냘픈 꽃잎을 자동차가 무참히 밟고 지난다.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아이들의 눈물 같다.


<장전계곡에서 먹은 라면 두 개>


하루 신세 진 안 선생의 집은 도로보다 약간 높다. 며칠 만에 깨끗한 잠자리에 들어서인가 몸이 개운하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는 중 저편 산자락에서 뿌연 가루가 날린다. 송홧가루다. 오래 전 회사에서 북한 금강산으로 단체 여행 갔을 때 송홧가루 한 봉지를 사 왔다. 몸에 좋다는데 차일피일 먹지 않고 놔두었다가 누군가에게 준 것 같다.


오늘은 오른쪽으로 오대천 물길을 잡고, 왼쪽으로 깎아지른 산에 기대어 걸었다. 오대천 명물인 119m 백석폭포를 지나왔다. 인공폭포이지만 물을 펌프로 끌어올리지 않고, 1,237m 백석봉의 물줄기를 돌려 이곳으로 흐르게 하여 사시사철 물이 떨어진다. 물줄기는 수직에 가까운 경사면을 때리다 떨어지다 또 때리기를 수십 차례, 여리디여린 외줄기는 드디어 오대천 품에 안긴다.


강원도 하천은 대개 이리 굽이치고 저리 굽이쳐서 마치 휘어지고 늘어진 굽은 소나무 같아 걸으며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러나 오대천은 꼿꼿하게 솟은 침엽수처럼 남북으로 곧게 뻗었다. 왼쪽 절벽은 경사가 급해 곳곳에 낙석 방지 구조물을 설치하여 삭막하고, 오른쪽 하천은 길 아래로 흘러서 잘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목표로 도로공사 중이어서 걷는 맛은 없었다.


오후부터 많은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빨리 숙소를 잡으려 했으나 가도 가도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 지도 거리뷰에서 보았던 장전계곡 입구 민박집은 문 닫은 지 오래된 듯싶었다. 마을이라도 있으면 어디든 하루 몸 누일 곳을 얻어 보겠지만, 산과 강으로 이어진 계곡에 사람 살 틈이 보이지 않았다. 잘 곳은 20여 km 떨어진 진부에나 있다. 이 길에 다니는 시골 버스는 한 대뿐인데 언제 올지 모른다. 세찬 비를 피할 곳도 없다. 다급했다.


장전계곡길 입구 안쪽에 ‘닭백숙 민박식당’이라고 적힌 작은 간판이 눈에 띄어 전화를 걸었다. 여름이나 되어야 영업을 시작한다는 주인장의 말에 도보 여행자인데 하루만 재워달라고 통사정하여 허락을 받았다. 주객이 전도되었지만 아쉬운 건 나였다. 다행히 주인이 차를 가지고 내려왔다. 산속으로 3.5km나 들어갔다. 주인은 안채와 뚝 떨어진 손바닥만 별채 방 하나를 내주었다. 간이 싱크대 수도를 틀었다. 벌건 녹물이 한참이나 나와서 식수로는 불가능했다. 민박 주인이 보일러를 틀었다는데, 지난 가을과 겨울을 지나며 온기 하나 없던 구들에 잠시 보일러를 틀었다 한들 냉기만 가실 정도였다. 앉으면 엉덩이가 좌우 벽에 닿을 정도로 좁은 화장실 겸 욕실에서 녹이 가시지 않은 찬물로는 도저히 목욕할 수 없었다. 걸으며 몸이 땀에 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세수만 겨우 마쳤다.


오늘은 빵과 구운 계란도 떨어져서 점심도 걸렀다. 점심때가 지나며 구멍가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 집은 민박식당이라지만 비수기라 식당과 민박 영업을 하지 않았다. 밥을 청하면 자신들 먹을 찬으로 상을 차려주겠지만, 그렇게 얻어먹고 싶지는 않았다. 배가 덜 고팠나 보다. 오늘 혹시 숙박과 식사가 여의치 않을 것 같아 아침에 구멍가게에서, 라면 세 봉지와 생수 2L를 산 게 다행이다. 라면 하나는 내일 아침용으로 남기고 두 개를 삶았다. 종일 굶고, 무거운 배낭 짊어지고 걸었기에 배가 등에 붙었지만 갑자기 어금니 통증이 심해서 씹을 수가 없었다. 라면을 후루룩 목구멍으로 넘기기만 하였다. 영양가는 부차적 문제이고 우선은 허기를 채워야 했다.


나는 숙박업소의 청결에 그다지 예민하지 않다. 어디든 숙소 이불을 덮고 잠을 자는 편이지만 이곳에서 내준 이불을 덮지 않았다. 비장의 무기인 초소형 침낭을 꺼냈다. 4월 중순의 강원도 산골은 추웠다. 땀에 전 아래위 등산복을 입고 침낭에 기어들어 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마음이 스산해졌다.


오전에 정선군 남평리 벚꽃 풍광도 예사롭지 않아 꽃비를 맞으며 걷다가 2km 정도 길을 잘못 들었다. 왕복하면 4km를 더 걸었다. 내일은 진부까지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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