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에 대해 나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가보고 싶은 게 아니라 꼭 찾아가야 했다. 서울서 버스로 출발하여 여섯 시간 걸려 진도 팽목항에 도착하였다. 4월 16일이다. 넓은 주차장에는 차가 가득했다. 팽목항에서 사고 해역인 맹골수도까지는 수십 킬로미터 거리라서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사고 이틀 뒤 배는 완전히 가라앉았고 주검만 매일 육지에 올랐다. 백구가 넘고 이백 구가 넘었다. 인근 잡화점 할머니에게 들은 대로 자갈밭에 갔다. 거친 바다를 겨우 벗어난 주검들은 이곳 차가운 자갈밭에 뉘어졌다. 자식의 주검을 확인한 부모는 피 울음을 흘렸고, 그들의 삶은 정지되었다. 나는 그곳에 앉아 자갈을 손으로 쥐었다. 바다는 평온했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일어나서 방파제 끝에 서 있는 빨간 기다림의 등대로 걸어갔다. 공식 행사는 끝났지만, 추모제가 진행 중이었다. 등대에 이르는 방파제 왼쪽으로는 추모 조형물과 노란 깃발이 줄지어 서 있다. 하나같이 끝이 너덜거린 처참한 모습이다. 3년 동안 팽목의 바닷바람이 할퀸 자국이다. 뒤집힌 배 안에서 엄마를 부르며 차디찬 물속에서 죽어간 아이들. 그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원인이 규명되었다면 저 많은 깃발도 온전하였으리라. ‘보고 싶고 만지고 싶’ 마지막 글자 ‘다’가 사라진 깃발. 엄마는 얼마나 자식이 보고 싶고 만지고 싶었을까.
방파제 벽에는 미수습자들의 사진과 유족들의 절규가 현수막을 울린다. 4대 독자 현철이 어머니가 “아들아, 이젠 집에 가자”라고 하신다.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목이 메었다. 긴 머리에 안경 쓴 은하의 어머니는 현수막에서 “제 아이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엄마랑 이제 집에 가자”, “만지고 싶다. 내 딸아”라고 말한다. 현수막 앞에서 나는 한동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만지고 싶다…” 자식의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고, 머리를 쓰다듬고, 품에 꼭 안아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299명 수습자 가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추모 행사에서 유가족 한 분이 마이크를 잡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죽을 때까지 아이와 함께 있겠다고. 여는 노래, 해금 연주, 추모 춤, 세월호 동화 낭독, 대금 연주, 고등학생 단체 춤 공연, 판소리, 중고등학생들의 합창으로 추모제가 이어졌다. 모두 개인적으로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분들일 것이다.
아픔을 아파하고, 슬픔을 슬퍼하면 안 될까? 수많은 죽음 앞에서, 더군다나 피어나지도 않은 어린 영혼들 앞에서 보수니 진보니 정파 따위가 뭐란 말인가. 같이 아파하지는 못할망정 진상규명을 외치며 곡기를 끊은 유가족 옆에서 일군의 무리가 치킨과 피자와 자장면으로 폭식하며 조롱하고,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시체장사 한다는 망언을 공공연하게 내뱉는 야만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단 학생에게 어느 노인이 빨갱이라 욕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분노보다 슬픔이 앞섰다. 자신의 가족이라도, 내 아이라도 그랬을까? 정치인들과 달리 평범하게 사는 우리는 아픔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후손들은 이런 시대에 살아야 한다.
방파제에는 때 이른 4월의 햇볕이 따가웠다. 저 건너 진도 항로 표지소 타워 뒤로는 물안개가 섬을 삼킨다. 내일 도보여행 첫날부터 비가 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