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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숲 - 50화

진도읍

by 조성현

기억의 숲 / 진도읍


1일 차(4월 17일)

팽목항~기억의 숲~임회면~진도읍 23km

도보 첫날부터 비가 내린다. 재작년 해남 땅끝마을 출발 때에도 비를 맞고 걸었다. 배낭 무게를 줄이려고 등산용 우비 대신에 천 원짜리 편의점 비닐 우비를 준비하였다. 바람에 쉽게 찢어지지만 입고 벗기 편하고 통풍이 잘되어 땀이 덜 찬다. 비를 맞으며 걸으면 불편하고 위험하다.


살면서 어찌 편할 수만 있으랴. 나이 들면 몸 여기저기 고장이 나서 아프다. 짜증 낸 들 통증이 물러가지 않는다. 통증도 내 생활의 일부다.

우중 보행도 마찬가지다. 누가 빗속을 걸으라 한 것도 아니다. 장거리 도보여행이란 일부러 내 몸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힘든 우중 보행도 편하게 받아들인다. 비가 오면 공기가 맑다. 4월에는 황사와 미세먼지가 심하다. 종종 비가 와야 나에게도 좋다.


진도는 섬이지만 걷다 보면 섬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평야까지는 아니어도 곳곳에 논밭이 넓다. 어린 모가 빽빽하게 담긴 모판이 논에 널려 있다. 부지런한 농부는 밭을 곱게 갈아 놓았다. 길가에는 야생화가 무성하다. 풍요의 땅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

18번 국도를 따라 4km쯤 걷던 중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든 <백동 무궁화동산 세월호 기억의 숲> 입 간판을 만났다. 이곳에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숲이 조성되었다. 숲 조성에 배우 오드리 햅번의 아들이자 어린이재단 설립자인 션 페러 헵번의 제안으로 삼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오드리 헵번은 배우로서 명성을 뒤로하고 아이들을 위한 구호 활동에 헌신하였다. 그녀의 뜻을 이어 아들도 <기억의 숲>을 조성하게 되었다. 동산 가운데 길을 두고 아래쪽은 무궁화동산이고 위쪽이 기억의 숲이다. 무궁화는 개화 시기가 아니어서 볼 수 없었다. 기억의 숲 나무에는 한 그루마다 희생자 사진 또는 초상화와 유족들의 편지가 적힌 네모 판이 달려 있다. 편지 내용은 주로 “보고 싶다”였다. 보고 싶다는 말 외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단원고 2-9반 조은정 양 나무에는 다른 쪽지가 붙어 있었다.


“그리울 때 언제나 찾아올 수 있도록 기억의 숲 잘 가꾸고 지키겠습니다. 2016.4.9. 진도군 녹색산업과 산지기”


그래, 그거다. 이 땅에 남의 아픔에 같이 아파할 줄 알고, 남이 눈물을 흘릴 때 같이 울줄 아는 수많은 사람이 있기에 희망은 남아 있다. <기억의 숲> 길을 따라 노란 바람개비가 줄을 지어 돌고 있다.


오늘 첫날이어서 그런지 몸과 발이 힘들다고 아우성친다. 며칠 지나면 몸이 길에 적응한다. 내일 해남 땅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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