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를 벗어나 산자락에서 내려오자 노란 유채꽃이 너른 밭에 한가득 피어있다. 꽃 색깔에 끌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밭 가장자리 비어있는 축사 옆에서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구부정하고 마른 체구에 얼굴은 까맣게 그을었고, 파란 삼선 트레이닝 바지에 빨간색 낡은 셔츠를 걸친 사내의 발가락은 슬리퍼 속에서 흙투성이 상태였다. 말을 건넸다.
“밭이 너른데 이 많은 유채꽃을 다 심으신 거예요?”
“네, 내가 직접 심었어요.”
“여기에 왜 심었어요?”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기름 짜려고 심었지요.” 머쓱해졌다.
유채꽃 하면 제주도가 먼저 떠오른다. 드넓은 제주의 들판에 만개한 오월의 유채꽃은 육지 사람들 가슴에 바람을 불어 넣어 제주로 향하게 한다. 그 영향 때문인가, 유채 하면 관광이 먼저 떠올랐다. 이곳 남도 섬 산자락 구석에 누가 유채꽃을 보러 오겠는가. 나에게 유채는 관광이었지만 그에게는 생계였다. 무심함으로 민망해졌다.
밭 가장자리 벽돌 화덕에 커다란 양은 솥단지가 걸려 있고 뭔가 끓고 있었다. 나뭇가지 때는 냄새가 고소했다. 산에서 채취한 고사리를 한솥 가득 데치는 중이란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거 말려서 팔아 봐야 만 원밖에 안 된다며 나이 오십이 안 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자랑이라도 하듯 자신도 전에는 전답 육천 평이 있었단다. 언제부턴가 마누라가 친정 간다며 자주 집을 비웠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집을 비운 것이었다. 그때까지도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마누라는 애들 놔두고 자신 몰래 밭을 팔아치워 도망갔다. 여자를 다시 얻어 새장가 가려 하다가도 그런 일을 또다시 당할까 봐 혼자 산다는 것이다.
시멘트 바닥에 망을 깔고 솥에서 펄펄 끓는 고사리를 건져 널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풀어 놓는다. 지금은 가진 건 없지만 마음 편히 산단다. 약간 횡설수설하여 어디까지 사실인지 모르지만, 여하튼 그는 진도에서도 오지에 혼자 살며 누구와 이야기 나눈 지 오래된 듯싶었다. 좋은 여자 만나 새장가 들라는 말을 끝인사로 건넸다. 가진 것 없고, 몸도 성치 않은 데다가 외부와 담을 쌓고서 자기 안에서 사는 사내와 같이 살 여자가 흔치는 않겠지만 짝을 만나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진도의 육이오 실향민>
군내우체국을 지나자 농어촌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특이한 촌락과 마주쳤다. 수십여 채 모든 집이 가옥 형태도 똑같고 벽 색깔도 미색으로 동일하다. 모두 주황색 양철 지붕을 얹은 채 비탈에 삼중으로 200여 미터 길을 따라 지어졌다. 새로 단장한 티가 역력한 안농마을이다. 한반도 육지 서남단 진도에 실향민의 아픔이 서려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쟁통에 이곳 주민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군의 작전 계획에 따라 이리저리 2천 리 길을 밀려다니다 이곳 진도에 정착했다. 전쟁 중에 한국군은 황해도 풍해면 피란민 천여 명을 평양 아래 초도라는 섬으로 소개하였다. 이들은 다시 군의 계획에 따라 백령도에 정착하였다가 목포로 이동하였고, 최종 목적지인 진도 해창에 내렸다. 그중 일부가 이곳 안농 산비탈 수용소에서 생활하였다.
속초 아바이마을 실향민들은 조국이 통일되면 고향으로 갈 것이라 하여 북과 가까운 속초에 터를 잡았다. 그들에게 속초는 임시로 머무는 곳이었다. 남도 끝 진도로 내몰린 실향민들은 배가 아니면 벗어날 수 없는 섬에 갇혔기에 귀향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육지의 피란민들보다 컸으리라.
진도에서 이들의 삶은 지난(指難)하였다. 누구도 제 앞가림하기 어려웠던 전후(戰後)에 이들은 한 뼘 땅뙈기도 없이 맨몸으로 섬에 떠밀려 들어갔으니 스스로 목숨을 부지할 길을 찾아야 했다. 남자들은 장에 나가 나무와 엿을 팔았고, 여자들은 물건을 사다 되파는 장돌뱅이로 삶을 이어갔다. 이후 이들은 맨손으로 개간한 간척지를 받아 정착하였다.
1959년부터 거주한 안농마을의 주거환경은 피란민들의 비참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듯 매우 열악하였다. 산 중턱을 깎아 3단으로 택지를 조성하고 흙집을 지어 살았다. 섬마을 어느 곳에서나 이런 식으로 집을 짓고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외지에서 고립되어 살던 이들에게 나라에서 주택 개량을 지원하였다. 2014년 진도군에서 국비를 보조받아 리모델링 사업을 벌여 지금은 말끔한 생태다. 야트막한 언덕 아래 지방도로를 따라 기와 황토 돌담이 이어지고 60여 년 만에 깔끔한 집이 지어졌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다수는 육지로 떠났고 100여 명은 마을 뒷산에 묻혀 혼백만이 고향을 찾을 동안 안농마을 실향민은 외롭고 잊힌 삶을 살았다.
<벗어나고 들어서며>
섬 아닌 섬 진도의 북쪽 끝자락에 다가갔다. 섬을 벗어나는 이들을 잠시라도 더 머물게 하려는 듯 해발 112m의 망금산 전망대가 손길을 뻗쳤다. 그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왕복 2km 정도이지만, 평지에서도 추가로 2km 걷는 게 부담되는 마당에 그곳은 급경사로다. 전망대는 다음에 가기로 하였다.
진도대교에 올랐다. 진도대교는 울돌목 위로 가로질러 육지 해남 땅에 가닿는다. 진도와 해남 사이 좁은 유리병 같은 해로가 울돌목이다.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은 13척으로 왜선 133척을 격파한다. 명량대첩이다. 다리 중간에 서서 물길을 바라보았다. 예사롭지 않다. 거칠다. 곳곳에서 물길이 휘돈다. 범의 발톱 같은 물길에 왜병들이 수없이 죽어갔다. 울돌목의 포효를 들으려 다리 위에서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 하나 제대로 해 놓은 거 없이 살아온 위인에게 들릴 리 만무하다.
다리를 건너면 해남군 문내면이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던 전라우수영이 있던 곳이다. 이제는 <해남우수영관광지> 간판을 달고 있다. <명량대첩전시관>까지 갖춘 곳에서 굳이 관광지라고 칭해야 할까?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구운 계란과 빵을 먹으려다 관광지 건너편에 7천 원 하는 한정식 뷔페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위장을 채우고 식도까지 찬 느낌으로 식당을 나와 길을 재촉했다. 오늘 숙박할 문내면을 지나 오른쪽으로 길을 잡았다. 7km가량 더 가야 한다. 밭에서는 대파 수확이 한창이다. 곳곳에서 대파를 다발로 묶어 트럭에 싣고 있다.
오늘 종착지 해남 황산면 신흥리에 도착했다. 걸어온 길을 버스 타고 거슬러 문내면까지 가야 숙소가 있다. 빗방울이 옷을 적시기 시작했어도 시골 버스는 오지 않았다. 지나는 차를 보며 손을 흔들어 겨우 하나 잡아타고 문내면에 도착하여 시골 여관에 들었다. 지저분하고 냄새도 났지만 내 한 몸 누일 곳이라 반가움이 앞섰다. 내일은 해남읍 입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