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쾌청한 오늘 진도읍을 출발하여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대파한 울돌목을 건너 해남 땅으로 들어간다. 아침 햇살이 따사롭다. 읍내 4차선 도로를 따라 걷다가 시내를 벗어나서 오른쪽 구도로인 월강로로 들어섰다. 이어 호수인 월가제 옆을 끼고 걷는다. 아침 햇살에 윤슬이 반짝인다. 호수 건너 물과 맞닿은 동산에 붉은 꽃이 만발하다. 호젓한 길이 아름답다. 들녘에는 청보리 물결이 바람에 일렁인다. 저 멀리 빨간색 지붕을 이고 있는 농가 한 채가 산자락에 안겨있다.
읍내에서 진도대교로 이어지는 도로는 4차선 국도 18번이다. 과속 차량이 많아서인지 중앙분리대와 차단벽까지 설치하였고, 약 700M에 달하는 자동차 터널도 있다. 나는 이 길을 벗어나 구도로로 접어들었다. 역시 지나는 차량이 거의 없고 한적하다. 길고 굽이진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니 발아래 4차선 도로에서 차량은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스마트폰 지도로 다른 길을 검색하였다. 군내면사무소 옆으로 난 길을 찾았다. 명색이 면사무소가 자리한 곳인데, 식당 하나 없고 무척 한적한 시골이다. 그 옆을 따라 마을 길로 접어들어 100여 M쯤 가다 보니 경사로가 나오고 이어 좁은 임도가 나타났다. 승용차는 어림없고, 사륜구동 소형트럭만 다닐 수 있는 길이다.
그래! 이런 길이야. 다니는 사람이 없어 길에는 풀이 무성하다. 등산하는 기분으로 숲길을 올랐다. 고갯마루에는 너른 공간으로 시야가 확 트이며 양옆으로 거대한 바위 언덕이 객을 압도한다. 고두산과 설매봉 자락이다. 산적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이지만 작은 절경이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아스팔트 길을 걷다가 이런 길을 만나면 맛있는 짜장면 먹는 기분이다.
<때려잡자 김일성?>
도로변 어느 폐가 벽에 빛이 바랬지만 “만고역적 OOO을 때려잡자”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정자체인 것으로 보아 글자 본을 떠서 그 위에 칠을 한 것 같다. 일부러 지운 흔적인 OOO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김일성’이었다.
옛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왔다. 반공이 국시(國是)였던 시절, 유신 정권은 고등학교에서 총학생회를 없애고 그 자리에 학도호국단을 들여 앉혔다. 연대장이 총학생회장 역할을 하였다. 나도 고3 때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중대원을 인솔하였다. 땅바닥에 배를 깔고 모형 소총을 쥐고서 앞으로 나아가는 낮은 포복, 높은 포복 훈련을 받았다. M1 모형 소총을 어깨에 메고 제식훈련도 하였다. 미성년자인 우리는 교정에서 사람의 목을 겨냥하여 총칼로 찌르고 베고 개머리판으로 치는 총검술 훈련을 강요받았다. 총검으로 찌르며 외쳤던 구호가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이었다.
고교 시절 아무 생각 없이 받았던 군사훈련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전시 상황도 아닌 1970년대에 청소년들에게 사람의 목을 총검으로 찌르라는 훈련이 과연 온당한가. 청소년들에게 살상을 가르치는 교육이 정상적인가. 그보다 어떻게 미성년자들이 모인 고등학교를 준 군사 조직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혹자는 말할 것이다. ‘북한에서는 그보다 더 심한 군사교육도 하는데 남북 대치 상황에서 무엇이 문제라는 말인가’라고.
육이오전쟁 이후 오랫동안 역대 정부가 내세운 국시(國是)는 반공이었다. 우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북한과 이데올로기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특수 상황인 것은 맞다. 반드시 공산주의 이념을 뛰어넘어야 한다. 해법이 무엇일까. 헌법 제1조와 2조에 답이 있다. ‘헌법 제1장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장 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민주주의가 올바로 실행되고,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하며, 선출된 대표가 주권재민을 인식하면 국민은 폐쇄적인 북한식 사회주의보다 남한의 민주주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굳이 반공을 외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도로변 집 담벼락에 “때려잡자”라는 무시무시한 문구는 아이들도 볼 수 있는데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슬픈 웃음을 흘렸다.
<전란의 비극>
숲길을 벗어나자 세운 지 오래되지 않은 커다란 비석과 석물들이 모여 있다.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는 외딴곳이다. 비석에는 <6‧25전란마을희생자위령비>라 새겨 있다.
2005년 국가에 의해 설립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세운 것이다. 위령비 양옆 두 개의 석조 분향단에는 각각 “이곳은 6‧25 전란 때 마을 희생 2천 명 중 우선 제1차 28위의 초혼 묘역입니다.”와 ‘6‧25 전란 때 마을희생자 제2차 152人 진실 결정자 중 20人 초혼자 제단’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옆 추모비에는 152인의 억울한 원혼을 추모한다고 적혀있다.
섬에서 6‧25 전란 때 엄청난 참사가 발생하였다는데 그 내용을 알 길이 없다. 동족상잔은 전국을 피바다로 만든 것이다.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 남북 모두 평화의 길로 가야 한다. 위령비 앞에서 잠시 묵념만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