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 어쩌다 그런 위대한 별칭을 얻었을까 생각해보면 그가 평생 남긴 작품수, 다양성, 음악성, 참신함, 아름다움, 헌신과 노력 등 그 무엇 하나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거니와 그 이후 후배 음악가들이 따를수 밖에 없는 형식적으로 기술적으로 뛰어난 걸작을 많이 남겨서일 것이다. <평균율 클라비아 모음곡>, <마태 수난곡>, <무반주 첼로 모음곡>, <b단조 미사>, 수많은 칸타타는 조성의 확립, 대위법의 기술, 악기의 기법, 음악적 깊이의 표현 등에 있어 정점에 달한 걸작이다. 또한 대중의 사랑 없이는 그런 자리에 오를 수 없으리라는 것은 당연지사. 여전히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바흐의 음악은 마음을 청정하게 해주는 해독제이다.
하지만 서양음악사를 어깨에 진 바흐의 음악이 엄숙하고 심각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칸타타를 창작하며 장대한 교회음악을 통해 신을 찬양한 바흐에게도 내밀한 개인사가 없었을 리 없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개인사가친근하고 소박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만든 모음곡<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음악수첩>이 그렇고 오늘 소개하는 <멀리 떠나는 형을 위한 카프리치오>가 그렇다. 이 카프리치오는고향을 떠나는형을 향한 동생 바흐의 사랑과 걱정, 아쉬움이 담겨있는 아름다운 곡이다.
안젤라 휴이트가 하이페리온 레이블에서 발매한 바흐 <영국 모음곡> 음반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안젤라 휴이트가 연주한 이 음반에는 음반 커버에도 쓰여있듯이 <멀리 떠나는 형을 위한 카프리치오> 외 <이탈리아 협주곡>, <프랑스 서곡> 등 바흐의 굵직한 건박악기 음악이 실려 있다. 18세기 독일에서 유행했던 이탈리아 스타일과 프랑스 스타일을 바흐가 그 당시에 얼마나 잘 소화하고 있고 그것을 건반악기를 통해 능숙하게 구현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아름다운 걸작이다. 이 두 곡에 비해 <멀리 떠나는 형을 위한 카프리치오>는 소곡이며 음반의 주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주연을 뛰어넘는 돋보이는 조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카프리치오'는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곡을 일컫는 용어로, 이 곡이 카프리치오 형식인 이유는 형과의 이별이 아쉬운 바흐가 그 마음을 상상을 통해 자유롭게 구현해 냈기 때문이다. 6개의 악장마다 부제가 붙어있어 표제 음악적 성격을 띠는데, 표제 형식은 바흐의 작품 중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 형식이다. 또 형과의 이별을 앞두고 동생 바흐의 개인적인 감정이 실려있어 이 카프리치오는 더욱 친근하고 사적인 곡이 되었다.
당시 17세의 바흐보다 3살 위의 형 요한 야콥 바흐는 오보에 연주자였고 1704년 스웨덴의 왕 찰스 12세의 악단에 합류하기 위해 집을 떠나게 된다. 곡의 내용은 친구들이 요한을 말려보고 여행 중에 일어날 불행을 언급하며 떠나지 말라고 달래 보지만, 요한은 결국 떠날 결심을 하고 마차가 도착한 후 마부의 나팔소리와 함께 스웨덴으로 떠난다는 내용이다. 바흐는 이를 각 악장에 이야기를 부여해 사랑스러운 음악으로 표현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에 덧씌워진 대가의 엄숙한 이미지와는 다른 너무나도 개인적이고 귀여운 악상이 듬뿍 담긴 작품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리오소, 아다지오 - 친구들이 모여 출발을 만류한다.
2) 안단테 - 여행 도중에 닥칠 위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3) 아다지시모 – 탄식하는 친구들
4) 안단테 콘 모토 - 요한은 떠나기로 결심하고 작별을 고한다
5) 알레그로 포코 - 마차의 도착과 마부의 아리아
6) 마부의 나팔소리를 모방한 푸가
요한의 출발을 말리는 친구들은 다정한 선율로 나타나며 타이르고 걱정하는 듯한 말투가 선율 속에 그대로 담겨있어 재미있다. 꾸밈음은 말을 하는 어투를 묘사하는 듯하고, 서글픈 선율은 이별의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여행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나직한 선율이 근심 가득히 펼쳐진다.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 슬퍼하는 친구들의 탄식은 느리고 체념하듯 우울한 단조로, 서운하지만 출발의 결심을 알리는 두터운 화성은 스타카토로 단호하게 등장한다. 마차가 도착하고 마부의 나팔 소리를 모방하는 피아노의 경쾌한 움직임은 옥타브를 넘나들며 댕댕 울리고, 마지막곡은 마부의 나팔소리를 모방하는 푸가로 끝을 맺어 마차가 떠났음을 암시한다. 짧지만 간결한 내용, 행동과 감정을 음악으로 옮겨놓는 기발한 솜씨, 바흐의 가족사와 형을 향한 마음을 엿보는 듯한 재미가 담긴 소곡이다. 이 짧은 드라마를 친근하게 그려낸 안젤라 휴이트의 연주는 바흐의 마음을 헤아리듯 따스한 시선으로 가득 차 있다.
1986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안젤라 휴이트의 바흐 음반. 휴이트는 이후 하이페리온 레이블에서 바흐 건반음악 전곡을 녹음한다.
안젤라 휴이트는 하이페리온 레이블에서 바흐 건반악기 레퍼토리를 11년에 걸쳐 18장 음반에 전곡 녹음했으며, 2016~2020년에 12회의 리사이틀을 통해 바흐 건반음악 전곡을 연주다. 휴이트 연주의 특징은 경쾌하고 가벼운 터치, 맑고 투명한 음색, 눈부신 활기에 있는데 바흐의 음악을 싱그럽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내 평단의 갈채를 받았다. 바흐의 건박악기 음악은 원래 하프시코드(쳄발로, 클라브생)를 위해 작곡된 음악이라 피아노 음악이라 하지 않고 보통 건반악기 음악 혹은 키보드 음악이라 통칭해 말한다. 현대 피아노로도 연주할 수 있지만 작곡가의 원래 의도와는 그 연주 효과가 달라질 수가 있다. 하프시코드는 레가토의 부드러운 효과보다도 낱개의 음을 뜯으며 음가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현대 피아노의 색채적인 블렌딩 효과는 명료한 특성을 희석시킬수가 있다. 따라서 현대 피아노 연주자들은 최대한 하프시코드의 음향을 참조해 피아노의 효과도 곁들이며 연주하는 타협점을 찾아 연주한다.
안젤라 휴이트와 같은 캐나다 출신인 글렌 굴드가 1960~80년대 그런 타협적인 바흐 연주에서 가장 독특한 성취를 이룬 연주자였고, 휴이트 역시 그녀만의 화사한 필치로 타협점을 찾아 연주했는데 그 밝고 투명한 음색의 주인공은 파치올리 피아노이다. 연주자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스타인웨이 대신 휴이트는 크리스털 같은 청명함과 엔돌핀 음색을 자랑하는 파치올리 피아노를 애용해왔다. 그 느낌은 잘 살아난 음악이 음반에 실린 <프랑스 서곡>이다. 프랑스 춤곡을 모아놓은 모음곡인데 우아함, 경쾌함, 리듬감 등을 가장 잘 구현해낸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는 프랑스 춤곡을 안젤라 휴이트는 역시 그녀만의 특기인 경쾌한 손놀림으로 그려냈다. 밝게 빛나며 사뿐사뿐 뛰어가는 연주가 그녀가 그리는 바흐의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