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바로크 음악을 듣다 보면 모든 작품들에 배어있는 공통의 정서가 있는 것 같다. 곡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기저에는 어떤 쓸쓸함이 담겨있다. 세상에서 제일 스펙터클한 장소였던 베르사이유궁에서 연주된 수많은 프랑스 음악에서도 단조의 애상이 종종 느껴진다. 분가루처럼 흩어지는 멜랑콜리. 물론 왕과 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전례음악, 미사곡은 화려란 팡파레에 웅장하기 이를때 없지만 서정적인 대목에서는 여지없이 애조띤 감성이 찰랑거린다. 고악기인 비올, 류트, 클라브생, 테오르보, 리코더 등으로 연주되는 실내악은 더 분명하게 허허로운 감성을 고고하게 표현한다. 베르사이유궁의 높고 긴 복도에 홀로 선 쓸쓸함이랄까. 그런 세밀한 감성은 분명 독일과 이탈리아의 음악과 다른 프랑스 음악에서만 느낄수 있는 감성이다.
소개하는 음반은 유럽 음악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연주자 2인의 최근작이다. 두 명 모두 프랑스인으로 장 롱도는 팝스타와 같은 외모로, 토마 던포드는 류트와 테오르보 연주로 발매하는 음반마다 주목을 받았다. 최근 고음악의 유행을 타고 프랑스 바로크 음악 역시 무대에 바쁘게 올려지고 있는데, 유럽 클래식 음악계에 바로크 음악 붐이 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독일-오스트리아 계열의 낭만파 음악이 주로 대중적 인기를 끌었는데, 최근에는 유럽 고음악 유행을 따라 바로크 음악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륄리, 라모, 쿠프랭의 작품은 프랑스 바로크 음악의 걸작으로 콘서트의 주요 레퍼토리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이 음반은 그런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음반이다.
루이 14-15세 재위시 베르사이유궁에서 연주되던 음악을 모아놓은 이 음반은 프랑스 바로크 음악의 종합선물 세트라고 볼 수 있을 만큼 궁정 취향의 소품들이 가득 담겨있다. 이 시절의 음악은 동일한 악절을 자주 반복해 음악적 감흥을 증폭시키는 형식을 취했는데, 두 명의 연주자는 세심하게 조율된 호흡으로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오고 사라지는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레퍼토리 구성은 모음곡 혹은 소나타 형식처럼 큰 덩어리의 작품보다도 낱개의 소품 20곡을 연주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모두 다 작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곡들이며, 류트와 클라브생의 이중주로 편곡되었고, 현이 뜯기며 공중에 퍼지는 잔향이 향기처럼 피어오르는 곡들이다. 프랑스 바로크 음악에 입문하기에 좋은 예쁜 음반이기도 하다.
전체 레퍼토리 구성은 매우 상상력이 넘친다. 프랑스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로베르 드 비제(1655-1732), 마랭 마레(1656-1728), 장-필립 라모(1683-1764), 프랑수아 쿠프랭(1668–1733), 마크-앙투안느 샤르팡티에(1643-1704), 앙투안느 포크레이(1672-1745), 미셸 랑베르(1610-1696), 장-앙리 당글베르(1629–1691) 등 비슷한 시기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활동헀던 음악가들을 총망라해 한 음반에 모두 담았다. 음반의 부제목이 '루이 14-15세 시대의 작품집'이니 그 당시 활동했던 최고의 음악가들을 한 음반에 모아놓고 상상 속의 베르사이유 콘서트를 펼쳐 놓는다. 물론 역사적으로 이들 모두가 한자리에 앉아 연주한 적은 없다. 그러나 장 롱도와 토마 던포드는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자는 재밌는 상상으로 음반을 구성했고, 베르사이유에서 열리는 상상 속의 음악회처럼 각 레퍼토리들을 엮어 역사적 재미를 추구하고 있다.
베르사이유궁의 야외 음악회
베르사이유궁의 음악회는 어땠을까? 태양왕의 이미지로 자신을 치장하기 좋아하던 루이 14세는 궁정발레, 서정비극, 오페라 발레와 같은 대규모 음악극과 춤으로 왕실의 권위를 프로파간다하기도 했으며, 종종 불꽃놀이와 분수까지 총동원해 스펙터클한 야연을 열기도 했다. 음악이 시각적 쇼와 곁들여져 왕의 권위를 드높이는 것이다. 베르사이유궁의 음악감독이었던 륄리의 음악에서 두드러지는 춤곡의 리듬과 우렁찬 팡파레는 자신을 스펙터클쇼의 주인공으로 만든 '관종' 루이 14세의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그 시대 프랑스 극음악은 발레와 오페라, 관현악 연주가 결합된 장대한 양식이었다. 이 또한 베르사이유의 권위와 어울리는 음악양식이었다. 이런 '그랜드' 스타일의 음악극은 화려함을 강조하는 왕실 행사와도 잘 어울렸고 만인의 록스타처럼 군림한 루이 14세의 통치 스타일과도 맞아 떨어졌다. 궁정의 예배당 '샤펠 후아이엘'에서는 샤르팡티에의 음악처럼 웅장한 미사곡이 울려 퍼졌다. 종교음악 역시 서곡 형식의 팡파레 요소들이 강조되어 관악기들이 힘껏 울어제끼는 매우 화려한 양식이었다. 하지만 궁정의 내밀한 곳,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맹트농 부인의 살롱이나 왕비 앙투아네트의 음악회 처럼 하프, 비올, 류트, 클라브생 연주자들을 불러 소규모의 챔버 뮤직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런 음악은 인간적인 감정이나 사랑스러운 악상을 진하게 담고 있는데 이런 소편성 음악들이 바로 이 음반 <바리케이드>에 담긴 곡들이다.
베르사이유궁의 왕실 예배당
음반의 첫 곡은 쿠프랭의 클라브생 작품으로 유명한 <신비한 바리케이드>이다. 바리케이드가 신비롭다니 무슨 뜻일까? 쿠프랭의 클라브생 작품들은 공상을 불러일으키는 제목, 무엇인가를 묘사하는 듯한 선율로 묘한 악흥을 불러일으킨다. 베르사이유궁의 비올 연주자 마랭 마래의 <인간의 음성>은 매우 여백이 많고 느릿한 곡이다 잔잔하게 깔리는 류트의 애조띤 선율이 마음을 때린다. 마레의 또다른 작품 <몽상가 여인>은 어둡게 침잠하는 분위기가 매우 아름다운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프랑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에도 실렸던 곡이다. 마레는 베르사이유궁의 뛰어난 비올 연주자였으며, 그 뒤를 이은 포크레이 역시 비올 연주자로 명성을 날려 10세때 루이 14세 앞에서 공연을 한 천재였다.
마레의 비올 음악이 다정다감하다면 포크레이의 비올 연주는 격렬하고 극적인 것이 특징이다. 음반에 실린 <포르투갈인>, <라 실바>, <주피터>가 그렇다. <모음곡 D단조>를 작곡한 로베르 드 비제는 류트, 테오르보 연주자로 루이 14-15세의 궁정악사로 봉직했다. 베르사이유 왕실 예배당의 찬송가, 미사곡 그리고 오페라까지 남긴 샤르팡티에의 작품 <자유없는 이 숲 속에서>는 노래 제목과는 달리 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의 소망을 읊조리는 그윽한 어조가 류트의 여운과 어우러져 고아하게 표현되었다. 당대 최고의 건반악기 연주자였던 장 앙리 당글베르의 <전주곡>과 <사라반드>는 클라브생 장식음의 섬세한 떨림이 섬뜩하도록 아름답다. 음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라모의 오페라 아리아 <나는 당신을 또 바라보네....>야 말로 다정한 목소리에 담긴 쓸쓸함이 잘 배어들어간 노래이다. 베르사이유궁을 훑는 긴 음악 여정을 텅 빈 홀에서 끝마치는 듯 아스라한 정취가 손에 잡힐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