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르익어갈 무렵 매년 11월이면 기흥 복지관 문화 축제 행사가 진행되었다. 수많은 수강생들의 그동안 쌓아온 실력들로 주옥같은 작품들이 보물처럼 쏟아져 나와서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 이게하고 감동과 감탄을 하지 않을 수없이 대단한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 사군자의 자리에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어 그대로 멈춰버렸다.
서예, 수채화, 뜨개질, 무용, 춤, 노래, 라인댄스, 국선도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건강 프로그램들도 많았다.
나는 작년에 “감사일기” 로 이어서 올해는 “소소한 여운의 기록들을 남기며”라는 주제로 수필 낭독을 하고 켈리그라피 “꽃”이라는 작품전시 출품을 하여 뭔가 뿌듯하기도 하고 기뻤다.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적 부끄러움도 많고 내성적인 성격에 소심했음에도 불고하고 국민학교 수업시간에 일어나서 책 읽기를 잘했고 선생님이 자주 시키기도 하셨지만 따박따박 읽기도 잘하였다.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고 노래도 잘하였다.
여름날 저녁이면 우리 집 마당 한가운데에 평상을 펴놓고 엄마가 끓여준 칼국수를 맛있게 먹은 후 언니들과 나는 평상에 누워 하늘에 별과 달을 보며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별빛에 흐르는 밤 같이 까만 눈동자”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언니들도 타고난 성량이 있어서 노래들을 잘하였다. 나는 학교에서 음악반의 단체 활동을 하다 보니 음악이 좋아서 성악가가 꿈이었지만 이루지는 못하였다.
나의 20대는 내 인생의 꽃 이 피던 시절이라 그런지 사회생활 하면서도 사람들이 그 목소리가 아깝다면서 성우를 해보라는 권유도 수없이 많았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무교동 낙지 골목과 명동 한 복판의 대형 다방에서 인기 DJ에게 쪽지를 건네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낭만을 즐기는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결국은 나에게 잠재되어 있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성우가 되는 꿈을 꾸면서 을지로 학원가를 누비며 그때당시 KBS 방송국 PD 옹상수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많은 공부를 하였다.
목소리만 좋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는 없다. 음악인들이 각자 개성으로 감정과 감성을 악보를 보고 전달받을 수 없듯이 글도 마찬가지다. 그 글의 대사 내용을 충분히 습득하였다 하더라도 강약조절과 발음 , 정확하고 적당히 띄어 읽기와 숨 고르기 등 각자 개성과 감성, 감정 조절도 너무 오버하거나 밑밑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방송국 성우 시험에 응시도 하였다. 성우가 인기도 많은 시절이라 경쟁자가 많아서인지 2차에서 낙방을 하였다. 같이 공부했던 목소리가 굵은 톤의 친구는 합격을 하였다.
또다시 도전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나의 큰 오라버니의 반대가 너무 크기 때문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만 해도 그런 쪽에 물이 들면 특히 여자는 되바라진다는 인식 때문에 조신하게 잘 있다가 시집이나 가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결혼 후 30대 시절에는 어릴 적 엄마의 종교 생활 속에 자연히 스며들어 나도 본격적인 원불교 신앙생활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내 세울 것이 없는 나에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곳에서도 목소리가 좋다는 이유로 뭔가 시키는 일이 많았다.
우연히 같은 교당에 문학 박사님이 계셨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나는 그분의 글과 시 낭송을 전담하면서 많은 걸 배우고 공부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크고 작은 행사에 사회까지 보게 되었다.
서울교구 합창단을 오래 하면서 나의 작은 꿈이나마 실현하는 것 같아서 행복하였고 대외적인 봉사활동으로 나름 신앙심 이 깊어지면서 내면의 나를 키워주는 원불교의 덕이 크기도 하였다.
지금은 복지관 수필 반에서 나를 키워주는 것이 아닌 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나이에 대중 앞에서 수필 낭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영광스럽기에 더욱 감회가 새롭다. 그러나 내년에는 진심을 다해서 나보다 젊은 선생님이 하시기를 간곡히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인연 복이 참 많은 사람인가 보다.
우리 수필반의 훌륭하신 선생님들 한 분 한 분 의 모습을 내 마음속의 작품처럼 그림으로 스케치하고 전시를 해 보며 소중한 인연의 감사함을 다시 한번 일깨우며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