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가고 있는 중입니다만
'세상에 나와 제법 긴 시간을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는 꿈에 그리던 곳에 가서 편히 쉬면서 일도 적당히 하며 살고 싶다!' 라고 말하면, 하늘에서 '아직 멀었어!' 라고 말하실지도 모르겠다.
세상살이 정말 만만치 않고 현실 또한 녹록지 않다.
살면서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거 많지 않다.
이제 됐네 하며 한숨 돌리려 하면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이 시험하듯 생기고 또 생긴다.
하늘은 여전히 부대끼며 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나의 중대한 착각이 있었다.
한때는 세상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해였다.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세상도 하늘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모든 문제를 만들고 스스로를 시험하고 있었던 것.
*
한때는 티브이 속 자연인의 삶을 동경했다.
유유자적하며 사람들 틈에서 들볶이지 않는 생활은 내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내가 원한 것은 자발적 고독이었지 세상과의 단절은 아니었다.
멋진 적요함과 세상에서의 소외는 비슷한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이질적인 삶의 모습인 것이었다.
뭐, 충분히 비논리적이고 충분히 이기적인 삶의 모습을 원했던 거다.
나는 적당히 자유롭고 적당히 외로운 삶을 원했던 거다.
속세를 떠난 스님도 혼자 사는 건 아니지 않은가.
혼자 또는 여럿이 또는 여럿 중의 혼자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조절하고 싶은 것이다.
시골과 도시를 적당히 섞어서 내 맘대로 살고 싶은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5촌 2도가 가장 적당해 보인다.
5일은 전원생활을 즐기고 조금 심심해지면 도시로 돌아와 외로움을 달래는 것이다.
*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서울을 기준으로 보면 제주도는 가깝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귀촌의 목적지로서 제주도만 한 곳이 또 있을까.
내게 있어서 제주도는 귀촌의 이상향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제주도의 키워드를 꺼내 보자.
섬
바다
한라산
오름
한달살이
일년살기
귀농
귀촌
여행지
휴양지
... ... ...
그렇게 아름다운 한라산과 멋진 바다를 떠올리며 제주도를 귀촌의 이상향이라 여겼다.
그러나 변화가 생겼다.
정확히는 변덕이겠지.
제주도는 여행지일 뿐 머무는 곳이 아니었다.
기후는 심술스럽고 물가는 비싸고 제주의 음식에는 더 이상 입에 침이 고이지 않았다.
제주의 장점을 보고 찾아가지만 가끔 보이는 단점은 제주를 밉게 만들었다.
아무튼 어느 날부터인가 제주는 귀촌의 이상향에서 흐릿해져 갔다.
*
어느 계절이 좋으냐고 물으면,
눈 내리는 겨울이 좋은데, 추위는 못 견딘다고 대답을 하였고,
바다에 풍덩 몸을 던질 수 있는 작열하는 태양이 있는 여름을 사랑하지만, 숨 막히는 더위는 싫다고 모순적인 대답을 늘어놓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처럼 한겨울에는 여름을 그리워하고, 무더위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릴 때는 겨울을 애타게 찾았다.
지금 곰곰 생각해 본다.
생각해 보니 나는 더위도 추위도 싫은 사람이다.
그러나 결국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여름을 택할 것이다.
질식의 더위는 죽기 살기로 참아내겠지만
추위는 참는다고 참아지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얼마 전에도 영하의 기온에 러닝을 하다가 두 손이 동상에 걸려 버렸다.
장갑을 두 겹이나 꼈는데도 말이다.
나는 태생적으로 추위에 약한 사람이란 걸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
제주도를 포기하면 아쉽다.
그만한 곳은 없다.
관광객이 몰려드는 시즌이면 떠들썩하지만, 비시즌에는 제주도도 한적하다.
시절에 따라 적당히 붐비고 적당히 외롭다.
제주도의 번화한 곳(제주시나 서귀포시)에서 조금 물러나 앉으면 외롭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만만한 제주도인데 나는 또다시 마음이 변했다.
느닷없이 다른 곳을 바라본다.
남도의 어느 마을로 가고 싶다.
아, 대체 네가 원하는 곳은 어디냐?
끝